[차차세계로의 산티아고 순례길 06] 무섭고, 무성한 소문으로 가득 찬, 메세타 고원

- 순례자의 피를 말리는 길, 메세타 평원 - 휴식과 격려, 그리고 맛있는 식사로 행복했던, 알베르게 - 자신만의 빛을 따라 걷는 순례자의 길

2024-09-20     양시영 인플루언서
이틀
[파이낸셜리뷰=양시영 인플루언서] 부르고스(Burgos)에서의 꿀맛 같은 휴식을 뒤로하고, 14일 차 여정을 위해 새벽부터 순례에 나섰다. 오늘은 순례자들 사이 무섭고 무성한 소문들로 가득 찬 ‘메세타 고원’을 걷는 날이다. ‘메세타 고원’, ‘메세타 평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구간은 말 그대로 고도가 높으면서 매우 평탄한 지형이다. 하지만 그늘도, 벤치도, 흔한 나무 한 그루조차 없어 순례자들의 피를 말리는 길이라, 부르고스에서 느슨해졌던 마음을 다잡기 아주 좋은 여정이었다.

아름다웠지만 고난스러웠던 ‘메세타 구간’

부르고스에서 혼타나스(Hontanas)까지의 거리는 33km다. 더욱이 메세타 구간은 약 13km 동안 바(Bar)는커녕 마을도 없어, 든든한 아침 식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아름다운
하늘과
무시무시한 소문과는 달리, 내가 마주한 메세타 고원의 첫인상은 마치 천국 같았다. 평야 지대라 시야가 탁 트여 아름다운 하늘을 있는 그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곳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황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면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으로 얼굴은 땀 범벅이 되고, 점점 체력적, 정신적 한계가 느껴져 길 한 가운데 주저앉고 싶은 심정마저 든다. 우여곡절 끝에 들른 중간 마을에서 팩 와인을 깠을 정도이니… 어느 정도 고난스러운 길이었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혼타나스 알베르게에서 맛본 최고의 빠에야

메세타 구간을 지나 장장 9시간을 걷다 보니 쾌적한 알베르게에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러던 중, 부르고스에서 1박만 하고 먼저 떠난 레오가 추천해 준 알베르게가 떠올랐고, 걸으면서 바로 그 알베르게에 전화해 예약했다. 도착하니 이미 샤워와 빨래를 마친 순례자들이 나를 반겨줬고, 오늘 걷느라 너무 고생했다는 따뜻한 격려 또한 받을 수 있었다.
혼타니스
레오가 이 알베르게를 추천해 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넓은 침대 간격으로 편안한 잠자리를 확보할 수 있어서였고, 두 번째는 알찬 구성의 식사로 맛있고 배부른 저녁을 먹을 수 있어서였다. 나도 당연히 식사를 신청했는데, 주메뉴로는 치킨 빠에야가 나왔다. 지름 50cm 정도 대형 팬에 빠에야가 담겨 나왔고, 순례자들은 그 크기에 한 번, 맛에 두 번 놀랐다. 나는 개인적으로 빠에야를 정말 좋아하던 터라, 빈 접시까지 싹싹 긁어 먹으며 배부르고 풍성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카리온 성당에서 만난 ‘기타 치는 수녀님’

다음날 향했던 카리온(Carrion de los condes)은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던 곳으로 기억한다. 길을 걸을 때도 날이 선선했고, 26km라는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 덕분에 가볍게 순례를 마칠 수 있었다.
수녀원에서
카리온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본 뒤, 미사 시간에 맞춰 성당에 갔는데 예상치 못하게 카리온의 자랑, 기타 치는 수녀님을 만났다. 이야기만 듣다 실제로 기타 반주에 성가를 불러 보니, 너무나도 색다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미사가 끝난 뒤엔 어김없이 신부님의 강복이 이어졌고, 강복 후에는 수녀님께서 순례자들에게 빛 모양의 작은 색종이를 나눠 주셨다. 주시면서 ‘걷는 동안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고, 또 자신만의 빛을 따라 걷길 바란다’라는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다.
카리온
순례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빛’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대체 이 길에서 빛이란 어떤 의미이고 존재이길래 반복되어 나오는 걸까? 이날 이후로 나는 카미노의 빛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빛에 대한 여러 가지 물음을 품은 채,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