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25일 일본에 태극기 게양

2024-09-25     어기선 기자
/2008년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82년 9월 25일은 일본 고베시에 박영효 등에 의해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날이다. 이날 태극기가 처음으로 게양되면서 우리나라 국기가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우리나라 국기를 제정하려고 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공식적인 사절단이 우리나라 국기를 다른 나라 한 복판에서 게양을 함으로써 정식으로 우리나라를 대외에 알린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 점에서 이날 태극기 게양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조인식에서 역관 이응준이 최초로 사용했다. 본래 조선은 국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돼왔지만 도안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1882년 5월 14일 미국 공사 로버트 슈펠트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를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통리기무아문 김홍집이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그리게 하고, 이것을 최초로 사용했다. 그 이전까지는 박영효의 태극기가 최초인 것으로 알려졌었다. 2004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면서 이응준 태극기가 최초로 인정받았다.

고종 직접 지시

박영효 일기 등에 따르면 태극기 제작에 고종 황제가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이 군주를 상징하는 붉은 색, 신하를 상징하는 파란색, 백성을 상징하는 흰색 등의 색 배치를 제안했다. 이에 김홍집은 일장기와 비슷하다고 지적하면서 주변에 조선 8도를 상징하는 팔괘를 추가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8괘는 너무 그리기가 어렵다면서 4괘로 단순화하면서 오늘날과 비슷한 태극기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1882년 9월 25일 일본에 3차 수신사로 박영효가 파견됐을 때 일본 기선인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건너가면서 공식 국기로 사용했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한 박영효 일행은 숙소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1883년 3월 6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요청을 고종 황제가 수락하는 형태로 태극기가 조선의 국기로 정식 공포됐다. 다만 태극기 도안은 그 이후에도 계속 바뀌게 됐다. 특히 8괘냐 4괘냐를 두고 논쟁이 이뤄졌고, 4괘의 배치에 대해서노 논쟁이 벌어졌다.

경술국치 이후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게 되면서 태극기 사용이 금지됐다. 그러면서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상징이 됐다.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에도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본제국주의는 태극기 제조 및 소지 금지를 내렸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태극기가 항일운동의 상징이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했다. 8.15 해방 당시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는데, 그들은 주로 일장기에 태극기를 그렸다. 파란 물감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먹물로 태극 문양과 4괘를 만들었다. 따라서 통일된 4괘 그림은 아니었다. 1948년 7월 1일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국기로 태극기를 채택했다. 다만 헌법에는 넣지 않기로 했다. 태극기 문양은 그 이후에도 계속 변화를 해왔지만 북한에 비해 우리나라가 정통성을 갖게 된 것도 태극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것이고, 우리의 역사인 조선의 역사를 잇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역사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단군 조선부터 내려온 5천년의 역사라는 것을 태극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