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0월 11일 팔만대장경 공식 완성

2024-10-11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251년 10월 11일은 팔만대장경이 공식 완성된 날이다. 팔만대장경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이라고 부른다.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년(고종 23년)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해 15년이 지난 1251년(고종 38년)까지 총 16년에 걸쳐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이미 한 번 만들었던 대장경을 만들었던 것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불린다.

몽골군 침략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된 계기는 11세기 고려 현종 당시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약 80여년을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출발한다. 이후 1232년(고종 19년)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소실됐다. 그러면서 대장경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명분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최씨 정권은 선종 불교에 가까웠다. 교종은 경선을 중심으로 한다면 선종은 참선과 수행을 중심으로 한다. 즉, 교종은 왕권중심을 강조하는 종교라면 선종은 개인의 참선과 수행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전쟁 상황 속에서는 구심점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선종보다는 교종을 내세워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고려 조정을 중심으로 국난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당시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를 했기 때문에 고려 백성들로서는 최씨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돌파하는 방법으로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자는 메시지가 필요했고, 이에 팔만대장경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대장경 제작과 승병 교환

고려의 불교는 조선의 불교나 현재의 불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찰에는 엄청난 토지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승려 역시 그 숫자가 방대했으며, 승려로 구성된 병사 즉 승병이 있었다.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승병이 필요했고, 승병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최씨 정권으로서는 그에 합당한 보상이 필요했다. 그 보상은 결국 팔만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다. 최씨 정권이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승병들은 전쟁터에 나가 몽골군과 싸우게 하는 일거양득의 상황이 된 것이다. 불교는 원래 살생은 금하게 돼있지만 우리나라 불교는 호국불교라고 해서 외적이 침입을 하면 승병들이 나가서 싸웠다. 최씨 정권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최씨 정권 입장에서 승병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명분을 줘야 했고, 그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었다.

왜 하필 경상남도

최우는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 지역에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했다. 해당 임시기구는 고려 전국의 승려들에게 맡겼다. 즉, 승려들이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전쟁터에 승병들을 동원하게 한 것이다. 경상남도 지역에 대장경 판각 임시기구를 설치한 이유는 경남 진주시가 최씨 정권의 개인 식읍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일대가 최씨 정권의 재산이었다. 즉, 최씨 정권 개인 재산에서 나온 물자를 가지고 팔만대장경을 제작하게 했고, 팔만대장경을 제작의 책임자를 승려에 앉힘으로써, 승병을 동원하게 해 몽골군과 싸우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