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아쿠자
2023-10-12 어기선 기자
묻지마 폭력 난무
에도막부 시대가 도래 하면서 더 이상 사무라이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사무라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바로 무차별 살인이다. 일본 기록들을 살펴보면 사무라이들이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칼날이 잘 드는지 시험하겠다’면서 무차별 살인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있다. 묻지마 폭력과 공포를 바탕으로 수많은 갈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들 조직에 대항하기 위해 마을 젊은이들의 모임도 등장했다. 그들 역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사무라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됐지만 역시 마을을 돌면서 보호비 명목으로 갈취를 했다. 마을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오십보 백보’였다.개항 이후 정부와 결탁
18세기 들어서면서 바쿠토, 데키야, 구렌타이 등이 등장하면서 야쿠자가 점차 구체화됐다. 바쿠토는 주로 대로변과 큰 읍의 상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름바닥을, 데키야와 구렌타이는 무역이 증가하면서 늘어난 장터와 암시장을 중심으로 서서히 세력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타난 개념이 오야붕(親分)과 꼬붕(子分)이다. 이는 두목과 부하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쿠자는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한 후 새롭게 변모를 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쇠락하면서 야쿠자 조직들이 정부에 뇌물을 주고 공군력들이 존재했던 자리에 자신의 조직원들을 침투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야쿠자와 정부 간의 밀착 관계가 탄생하게 됐다. 오늘날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 조직폭력배 조직원들이 정부기관에 침투해 들어간다는 설정은 이때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제국주의와 함께 성장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을 하면서 야쿠자 역시 함께 성장하게 됐다. 그러면서 일본 우익세력의 한 근간이 되기 시작했다. 즉, 야쿠자는 일본제국주의와 결탁하면서 극우폭력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흑룡회이다. 또한 한반도와 중국 등에 진출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의 한축을 담당하기도 햇다.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군국주의와 국수주의 상징인 야쿠자를 박멸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하지만 1947년 신냉전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등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일본 공산당이 급격히 성장하고, 일본 보수 정부는 이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야쿠자와 결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서 야쿠자는 건설이권 등이나 탄광 이권 등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