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차세계로의 산티아고 순례길 10] 799km 이정표로 시작된 산티아고 순례길, 28일 만에 100km대 진입

- 잦은 내리막 구간으로 오른쪽 발목에 통증이... - 온전히 즐기기 위한 새로운 목표가 생겨, 천천히 걷기로 - 알베르게에 모인 순례자들, 각자 삶의 한 조각을 공유

2024-10-26     양시영 인플루언서
카카벨로스에서
[파이낸셜리뷰=양시영 인플루언서] 전날 장거리 순례의 여파 때문인지, 순례길이 끝나가는 게 아쉬워서인지, 이날은 왠지 모르게 늑장을 부리고 싶어 약 8시경 순례에 나섰다.

부상 투혼 후 먹은 꿀맛 같은 라면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가장 감사했던 것은 약 36일을 걷는 동안 큰 사고 한번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은 부상도 없었던 건 아니다. 요 며칠 잦은 내리막 구간을 걸어서인지 오른쪽 발목이 아프기 시작했고, 중간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약국으로 돌진했다. 약사분께 증상을 설명하니, 효과 빠른 액상 파스 ‘볼타돌’이라는 제품을 권해 주셨고, 잠시 숨을 돌리며 파스를 충분히 바르고 나서 다시 순례를 이어갔다.
언제나
순례길
이날 도착한 카카벨로스(Cacabelos)는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상점, 바, 카페, 알베르게 등 있을 건 다 있는 알찬 곳이었다. 심지어 내가 묵은 알베르게 앞 식당에선 라면을 팔고 있었고, 한국인으로서 그곳을 지나칠 수 없어 바로 들어가 짜파게티를 주문했다. 스페인 시골길에서 7.5유로에 라면과 김치, 밥까지 든든하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허겁지겁 게 눈 감추듯 라면을 먹었다.

아쉬운 이별 뒤엔 새로운 만남이 찾아오는 법

다음 날, 베가 데 발카르세(Vegade Valcarce)라는 마을로 향하는 구간에는 100km대 진입을 알리는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출발할 당시, 도착까지 799km가 남았다는 이정표를 봤는데, 벌써 100km대에 진입하다니… 너무나도 빠른 시간의 흐름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땐, 프랑스 고전 루트를 일정에 맞게 끝낸 뒤, 피스테라(Fisterra)와 묵시아(Muxia)라는 성지까지 투어를 할 셈이었다 하지만 점차 걸을수록 순례에 임하는 현재에 집중하는 게 더욱 값지다는 걸 깨달았고, 이 순례길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정도의 페이스로 천천히 걷자는 새로운 목표 또한 세우게 되었다. 다시 말해, 순례길에 몸을 맡겨 보기로 한 것이다.
100km대
순례길
내가 천천히 걷기 시작하니, 아쉽게도 초반에 만났던 순례자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헤어짐 뒤에는 새로운 만남이 찾아오는 법이다. 이날은 프랑스인 ‘돔’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이분은 프랑스 중부에서 걷기 시작해 52일째 순례 중이라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약 50일간 걸으며 만난 수많은 사람과의 일화,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배경 등을 내게 말해 주셨고,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 함께 걸은 2시간은 마치 20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이 만난 이들과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도 더 즐겁고 알차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었다.

최고의 순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온다

한적했던
28일
폰프리아에
내가 폰프리아(Fonfria)라는 마을에 묵으며 느낀 한 문장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베가 델 발카르세 공립 알베르게에서 28일 차 순례를 시작했고, 걷다 보니 비가 와 우연히 폰프리아에 묵게 되었다. 이 마을은 알베르게가 단 하나만 있는 작은 마을임에도 시설은 물론, 주인 분도 너무 좋아 첫인상부터 포근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함께 묵은 순례자들 덕분에 이 마을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데, 약 15명가량의 순례자가 한데 모여 풍성한 저녁을 먹고 공용 공간에서 기타 반주에 노래도 하며, 우리는 각자 삶의 한 조각을 공유하기도 했다.
행복한
이 길에 내 심신을 온전히 맡기니 뜻밖의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기도 했다. 낯선 길에는 항상 두려움과 불안함이 따르지만, 그 뒤엔 선물 같은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폰프리아에서의 황홀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