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일본의 쌀 소동
2023-10-30 어기선 기자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악몽
일본은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더니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것은 물론 일본의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면서 생필품 생산기지의 이전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미국을 중심으로 생필품 생산이 이뤄졌다. 다만 보다 저렴한 공산품 생산이 필요했고, 그것을 일본이 도맡았다. 일본이 공장을 세우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그것을 유럽에 수출하면서 생필품은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그러면서 일본은 급격한 도시화가 이뤄졌다. 도시화가 이뤄졌다는 것은 농촌사회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쌀 생산량이 감소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러시아제국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산주의 세력 파급을 위해 시베리아 출병이 확실해지면서 쌀값 폭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1918년에 이뤄졌다. 쌀값은 폭등하는 반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도 이제 본격적으로 공장 가동을 시작하게 됐고, 생필품을 자국에서 충당하게 됐다. 즉, 일본산 제품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면서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급격하게 하락세를 보였다. 도시 임금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반면 쌀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쌀값이 폭등하는 사태는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다.산미증식계획 세워
쌀값 폭등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공급량’을 늘려야 했다. 하지만 일본의 농촌 사퇴는 급격하게 붕괴되면서 더 이상 쌀 생산량을 늘릴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일본제국은 한반도를 주목하게 됐고, 이에 산미증식계획을 세웠다. 한반도에서 쌀 생산량은 증가하고 있지만 그만큼 쌀의 이출량도 늘어나면서 생산량보다 이출량의 증가가 급격해지면서 한반도 내 쌀값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게 됐다. 그러면서 오늘날 선물거래소인 ‘미두취인소’가 탄생하고, 반복창이라는 인물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반복창은 미두취인소에서 쌀 선물거래를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쌀 선물거래로 망하게 된 인물이다. 어쨌든 1920년대 조선의 대일 무역 절반이 쌀로 채워질 정도가 됐다. 문제는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쌀값이 하락하게 됐다. 쌀값이 하락하면서 일본 내 농민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반면 한반도는 쌀 생산량보다 이출량이 더 많으면서 농민들이 먹고 살기 힘들게 됐다. 여기에 하층민의 주식인 ‘만주산 조(粟)’의 수입관세율이 인상되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게 됐다. 이에 조선 백성들은 만주로 넘어가서 농경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게 됐다. 워낙 많은 조선 백성들이 만주로 넘어가면서 중국 당국은 오히려 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됐지만 이것을 깨고 다시 관계 회복을 하게 된 계기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