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1월 6일 윤관 여진 정벌

2024-11-06     어기선 기자
사진=KBS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107년 11월 6일은 윤관의 여진정벌이 이뤄진 날이다. 이는 고려 숙종 때부터 준비해 예종 때까지 진행된 고려의 고토 수복 이념 및 북방 원정을 한 것이다. 동북 8성을 쌓았으며, 척준경의 활약이 유명하다. 동북9성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결정적인 패배를 했고, 여진이 화친을 요청하면서 9성을 포기하고 여진에게 돌려주면서 상황이 종료됐고, 여진족은 9성을 발판으로 성장해서 금나라를 세운다. 훗날 세종대왕의 4군6진 개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종대왕은 동북9성이 실패한 교훈을 배우고 익혀서 4군6진을 개척해서 완전히 우리 영토가 되게 만들었다.

함경도 지방에 여진족 거주

지금의 함경도 지방여 여진족이 거주했다. 고려는 거란과 귀주대첩을 끝으로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면서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여진족이 11세기말 완안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숙종 9년(1104년) 완안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면서 임간이라는 인물이 선제공격을 했다. 하지만 패배를 하고, 파직을 하면서 물러갔다. 이후 여진족과 화친을 했다. 이때 패배했던 것이 고려에는 큰 충격을 안겨주면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이에 별무반이 구성됐고, 무려 17만 8천명이라는 군대가 조직됐다.

윤관 별무반 이끌고

1107년 11월 6일 국경 지역 여진족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소식을 들은 예종은 결국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한 후 17만명의 별무반을 출정시켜 여진 정벌을 단행했다. 여진족 추장을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한군데 모은 후 모조리 제거하고 고려군은 총 4갈래로 나눠 동시에 타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무려 7만 5천호가 넘는 주민들이 사민정책에 동원됐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부작용이 됐다. 백성들을 이주하려고 하다 보니 마을이 먼저 형성됐고, 그 다음에 외성을 쌓는 형식이 됐다. 이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들면서 힘든 싸움을 해야 했다. 동북9성을 잃어버린 여진족은 계속해서 동북9성을 침입했고, 그때마다 군대를 동원해 막아내는데 급급했다.

동북9성의 반환

방비를 먼저 하지 않고 백성들을 이주시키면서 오히려 군대가 더욱 어려운 방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별무반이 패배하는 전투가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구원군이 끊기는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결국 동북9성을 여진족에 반환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은 공격하기는 쉽지만 방어를 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여진정벌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에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4군6진을 개척했을 때 공격도 중요하지만 수비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오랜 시간 동안 4군6진을 개척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