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농촌진흥운동

2024-11-07     어기선 기자
조선총독부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농촌진흥운동은 조선총독부의 지휘아래 1932년부터 1940년까지 8년에 걸쳐 진행된 관제 농민운동이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면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고, 1920년대 산민증식계획을 실시했다. 그로 인해 농촌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1920년대 일본에서 건너온 사회주의사상이 농촌 전역에 퍼지면서 조선총독부는 이에 대응할 대책 마련이 필요했다.

사회주의사상 번지는 것 막아라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탈하면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농민에게 경작권을 박탈하게 만들었고, 지주제를 강화하게 만들었다. 이에 자영농이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소작농으로 전환되면서 고율의 소작료를 납부해야 하는 고통을 안겨주게 됐다. 여기에 1920년대 일본에서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농촌사회에서도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에 노동공제회, 소작인 조합등이 노농총동맹이 됐고,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됐다. 그리고 1923년 암태도 소작쟁의가 발생하면서 점차 농민의 투쟁이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1930년대 들어서면서 농민조합운동으로 확산되자, 일제 타도, 제국주의 반대와 더불어 소작조건 개선, 수탈 반대, 일상적 이익과 관련된 요구가 늘어났다.

농촌진흥운동으로

이런 상황 속에서 1930년대 대공황이 한반도에도 들이닥쳤다. 그러면서 일본 경제가 몰락하는데 이어 우리나라 농촌 사회도 몰락하게 됐다. 그러자 농민들의 분노가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농민의 생활개선 및 정신계몽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에 전근대적인 지주제 등을 뜯어고치려고 했지만 별다른 개선이 되지 않았다. 이에 1933년 농가갱생을 내걸었다. 농가갱생이란 결국 ‘근면성실 및 검소함을 추구해야 농촌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농촌진흥운동이다. 농촌진흥운동은 농촌의 구조적인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농민이 가난한 이유는 게을렀기 때문이라면서 농민 개인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그리고 열심히 성실히 농사일을 하면 언젠가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줬다. 농촌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적 수탈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책 마련을 해야 하는데 농민 개개인에 그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여기에 심전개발운동까지 1935년 전개했다. 심전개발운동이라는 것이 전시동원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황국신민화하는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이런 일본제국주의 시대 당시 농촌진흥운동이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서 새마을운동으로 바뀌게 됐다. 다만 농촌진흥운동과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이 다른 점은 농촌진흥운동은 농촌이 가난한 것은 농민 개개인의 책임 때문이라면서 근면·성실을 강조했다면 새마을운동은 농촌이 가난한 것은 농민 개개인의 책임에 더해서 구조적인 문제 개선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농촌사회 자체를 바꾸는 작업까지 병행했다. 다만 새마을운동이 농촌진흥운동에 착안했다고 판단하는 역사학자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