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1월 9일 의열단 창단

2024-11-09     어기선 기자
약산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9년 11월 9일은 김원봉의 주도 하에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의열단이 창단된 날이다. 주로 일본제국의 고위층에 대한 암살 활동이나 주요 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을 거행했다. 김원봉은 3.1운동에 크게 감동하면서 의열 투장 결사대를 조직해 암살과 파괴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조직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중심으로

창립 단원들은 윤세주, 이성우, 곽경, 이종암 등이었다.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 중심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고, 13명의 단원이었다. 이들 13명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 ‘5파괴’ ‘7가살’ 등 행복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암살과 테러를 위한 전문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에 실패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비밀결사 조직이기 때문에 단원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2천여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 드러난 단원들만 700여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 여기에 김구, 김규식, 김창숙,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의열단 활동은

1920년 3월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윤세주 등을 국내로 잠입시켜,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 등을 폭파시키려고 했지만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면서 실패를 했다. 하지만 1920년 9월 14일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을 암살했고, 12월 27일에는 최수봉 의사가 밀양경찰서를 폭파했으며, 1921년 9월에는 김익상 의사는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 의거를 성공시켰다. 1923년에는 김상옥 의사가, 24년에는 김지섭 의사가, 26년에는 나석주 의사가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했다.

소규모 테러로는 안된다 인식

그러다가 의열단은 더 이상 소규모 테러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체계적이면서 새로운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파단했다. 이에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에 가입하면서 의열단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여기에 의열단에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좌파 민족주의자 등의 인물들이 유입되면서 사상적 다툼이 크게 일어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결국 김원봉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참여했고, ‘레닌주의정치학교’을 설립했으며,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김원봉은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훗날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데 일조를 했고, 6.25 전쟁도 참여했다. 하지만 이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하면서 남북 모두 의열단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