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내탕금

2023-11-09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내탕금은 임금이나 왕실의 개인재산을 의미한다. 흔히 비자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비자금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 이유는 비자금은 ‘비밀재산’이라는 성격을 띄고 있지만 내탕금은 조정과 관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왕실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비자금’과는 완전히 다르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숙청 당한 것도 ‘내탕금’ 문제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내탕금을 빼앗기기 싫은 이방원 형제들이 정도전을 죽이고, 내탕금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어마한 재산 가졌던 이성계

내탕금 문제는 태조 이성계가 엄청난 재산을 가졌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성계의 조상은 동북면(현 함경도)에서 대호족이었다. 공민왕 당시 고려로 귀부하면서 그 재산은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성계는 수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공신으로 책봉돼서 막대한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즉,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에 자신이 형성한 재산까지 합치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셈이다. 이성계는 함경평야를 소유했고, 이 함경평야에서 나오는 쌀 등을 통해 자신의 군대인 가별초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별초가 결국 조선을 건국하는 밑바탕이 됐다.

왕실재산 용납 못했던 정도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이 재산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게 됐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형성한 재산은 왕실재산이니 국가에 귀속돼서 국가재정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 입장에서는 이성계 재산이 계속해서 이성계가 관리를 한다면 이방원 형제들의 정치적 입지는 높아지게 되고, 그것은 신덕왕후 강씨의 자손인 이방석이 왕세자에게는 위협적인 무기가 될 것으로 보였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자녀 균등 상속이었기 때문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이방원 형제들이 차지하는 재산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으로는 이방번, 이방석, 경순공주 뿐이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재산이 이방원 형제자매들에게 돌아간다면 그 재산을 바탕으로 사병을 거느리게 된다. 따라서 정도전 입장에서는 사병 혁파를 하고 이성계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켜서 이들의 힘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이방원 형제들로서는 왕실재산이 국가에 귀속된다는 것 자체가 날벼락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그리고 실권을 장악한 태종 이방원은 결국 이성계의 재산을 왕실재산이라고 해서 내탕금으로 내수사에서 관리를 하게 했다.

광무개혁의 자금원

고종 시대에 내수사를 내장원으로 승격하면서 내탕금이 늘어나게 됐고, 이것이 광무개혁의 자금원으로 쓰이게 됐다. 내장원으로 승격하면서 기존의 토지는 물론 인삼 전매 사업, 철도·광산 사업 등을 내장원이 관리하게 했다. 이 내탕금을 갖고 근대적 교육기관을 세우거나, 네덜란드 헤이그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에 사용했다. 아울러 1909년 당시 연해주로 망명을 해서 임시정부를 세우려고 했을 때의 자금으로 사용하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고종 황제는 독일 공사관의 소개로 중국 상하이에 있는 독일계 은행인 덕화은행(도이치뱅크)에 51만 마르크의 내탕금을 예금하기도 했다. 오늘날 돈으로 대략 250억원 정도이다. 하지만 이 돈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덕화은행은 이미 다른 사람이 찾아갔다고 답변을 했다. 훗날 역사가 밝혀지기를 1908년 일제 통감부가 이완용 등 친일파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가짜서류를 만들어 고종의 내탕금을 인출해 간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내탕금이 독립운동으로 사용될 것을 눈치 챈 이토 히로부미와 통감부가 내탕금을 빼돌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 황제의 내탕금은 여전히 존재했고, 해방 이후 혼란을 거치면서 일부는 1950년에 만들어진 구왕궁 재산 처분법과 구황실 재산법에 의해 국고로 귀속됐다. 다만 나머지 재산은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일제가 내탕금을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 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