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고려거란전쟁

2024-11-13     어기선 기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고려거란전쟁 또는 여요전쟁은 993년(성종 10년)부터 1019년(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세 차례에 걸쳐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전쟁을 말한다. 서희, 양규, 김숙홍, 강감찬 등 여러 인물들이 활약한 전쟁으로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여몽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과 더불어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이후 고려사의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이면서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이후 상황

고려는 거란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강동6주와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국방력을 이뤄나갔다. 이는 고려-송나라-거란으로 이어지는 삼각의 균형 속에서 고려가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부적으로도 평화가 구축되면서 여러 제도와 문물을 정비했다. 무엇보다 송나라 입장에서는 고려가 든든한 우방의 역할을 하게 됐다. 송나라로서는 거란을 견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다보니 송나라에서 고려의 입지는 더욱 커졌다. 이에 소동파는 고려 사신의 만행에 대해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만큼 고려로서는 송나라와 거란의 관계 속에서 국제적 입지가 높아졌다. 거란은 고려거란전쟁으로 인해 상당히 크게 위축됐다. 이것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거란의 견제를 받았던 여진족이 크게 성장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로서는 여진족이 커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윤관의 별무반을 통해 동북9성을 쌓아올리고 사민정책을 통해 백성들까지 이주시켜 고려의 땅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여진족의 위세를 꺾지를 못하고 결국 금나라가 건국되기에 이르렀다.

문벌귀족의 발호

고려의 귀족 사회도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시기에는 지방호족들이 귀족이 됐다. 왕건 역시 호족들과의 혼인정책을 통해 귀족의 형성을 이뤄냈다. 하지만 광종이 과거시험을 도입하고, 성종 시기 최승로의 개혁정책 등을 통해 점차 유학자들이 조정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점차 문벌귀족이 됐는데 고려거란전쟁을 통해 ‘군권’(軍權)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귀주대첩의 강감찬, 강동6주의 서희, 동북9성의 윤관은 문관 시험을 통해 등용된 사람이다. 실전부대는 무관들이 담당했지만 총사령관은 문관이 담당한 것이다. 그러면서 문벌귀족들은 군사지휘권까지 담당하면서 기득권층을 형성해나갔다. 결국 무관들은 아무리 승진을 해도 정3품 상장군이 끝이었다. 반면 문관은 종1품 문하시중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무관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그것이 결국 무신의 난으로 이어졌다. 이후 무신들이 고려 중기에 권력을 장악했고, 그것이 고려 후기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조선으로 넘어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