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엑스포

2024-11-30     어기선 기자
반기문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엑스포는 세계박람회로 불린다. 국제박람회기구에서 주관해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박람회로 각국의 특정 지역에서 몇 개월 기간을 두고 여러 나라가 참가해 문물을 전시하고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까지 일본에서 통용된 명칭인 ‘만국박람회’라고 불렀지만 일제 잔제 이유 때문에 ‘국제박람회’로 바뀌게 됐고, 1993년 대전엑스포를 계기로 ‘엑스포’라고 부르게 됐다.

길드 체제 무너지며

엑스포는 중세유럽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길드 체제가 무너지게 되면서 시작됐다. 각 지역과 지역이 교류를 활발하게 하면서 정보 교류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무엇보다 각 지역별로 산업 발전 정도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나게 되면서 기술 발전을 한 곳에 모아두고 비교할 자리가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1756년 ‘영국산업박람회’가 열렸고, 1798년 ‘제1회 산업박람회’를 개최했다. 엑스포가 초창기부터 화려하게 시작한 이유는 왕조국가에서 자신의 나라에 대한 우월감을 다른 나라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즉, 정치 선전 도구의 장이 됐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엑스포는 냉전시대의 체제경쟁 도구로 이용됐다. 하지만 점차 상업주의 박람회로 자리매김을 했다.

에펠탑 그리고 햄버거

엑스포로 유명해진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는 에펠탑과 햄버거가 있다. 에펠탑은 1889년 파리엑스포에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것은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한 치욕을 만회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이다. 영국을 뛰어넘을 자랑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으로 탄생된 건물이다. 원래는 파리엑스포 이후에 철거할 예정이었지만 지금까지 남아서 파리의 상징이 됐다. 햄버거는 19세기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햄버그 스테이크 또한 함께 미국에 유입됐다. 주로 함부르크 지방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았고, 이민자들은 함부르크식 스테이크를 먹었기 때문에 ‘햄버그 스테이크’라고 불렀다. 이런 함부르크식 스테이크를 페티로 빵 사이에 끼워진 것이 햄버거가 된 것이다. 즉, ‘함부르거(Hamburg-er)’라는 명칭이 된 것이다. 햄버거의 시초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찰리 내그린이 1885년 위스콘신 주 시모어시에서 열린 ‘시모어 박람회’에서 미트볼을 빵 두 조각 사이에 끼워 판 것이 시초라는 주장이 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우리나라는 조선왕조 시기인 1883년 보빙사를 미국에 방문할 당시 1883 보스턴 기술공업박람회에 비공식으로 물품을 출품했다. 이후 1884년 한양에서 국제산업박람회를 열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1893년 시카고박람회에서는 한국관을 마련하고 물품을 출품했다. 1900 파리엑스포는 독립적인 국가관을 세워 본격적으로 참가했다. 이때 대한제국관은 프랑스의 페레(E. Feret)가 설계한 것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모방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대한제국은 박람회를 참가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광복 이후 1962년 시애틀 엑스포에 대한민국 이름으로 처음 참가를 하면서 계속 참가를 하게 됐고, 1993년에 대전에서 첫 인정 박람회가 개최됐고, 2012년 두 번째로 여수 엑스포가 개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