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낸셜리뷰] 메뚜기가 만나 한나절을 재미있게 놀았다. 메뚜기는 헤어지면서 하루살이에게 말한다. “하루살이와 우리 내일도 만나 재미있게 놀아.”
하루살이는“내일이 무언데?” 메뚜기가 말하길 “오늘 졌던 해가 다시 떠오르면 새 아침이 되고 그것이 내일이 되는 거야.” 하루살이는 쓸쓸히 말한다. “미안해. 나는 해가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도 몰라. 우리에게는 내일이란 없어.”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관용표현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 고로 자기합리화의 오류를 잘 알기 어렵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냉철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꾸준한 성찰과 공부가 필요하다.
장자(莊子)는 우화를 통해 삶을 소풍으로 보고 그 자체를 즐기라는 것 곧 ‘소요유(逍遙遊)’를 강조했다. 만사에는 상반된 가치가 존재하니 옳고 그름을 너무 따지지 말라고도 한다.
친구 질에 따라 행복이 판가름 된다. ‘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오랠수록 좋다’는 말은 많은 시간을 함께 공유했기에 더욱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 시간보다 정신적 신의가 축적되어야 한다. 인디언 속담에는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자’를 벗이라고 한다.
미국 시인 랠프 에머슨이 “한 친구를 가지는 유일한 방법은 한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런 우정은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처럼 숭고하다.
한자로 친구(親舊)는 ‘가까이에서 오래 두고 본 사람’을 말한다. 친구를 붕우(兄弟)라고도 한다. ‘벗 붕’(朋)은 새의 양 날개를 의미하고, ‘벗 우’(友)는 사람의 두 손을 뜻한다. 진정한 친구는 새의 두 날개와 사람의 양손처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라는 얘기다.
우리에게 필요한 친구는 얼마나 될까? 고대 철학자들은 숲속의 작은 집 방 안에 초대할 숫자만큼의 친구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했다. 영국 문화 인류학자 로빈 던바의 ‘발칙한 진화론’에 따르면 한 사람이 사귀면서 믿고 호감을 갖는 친구의 수는 최대 150명에 불과하다.
당신은 큰 존재다. 이미 충분히 크다.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큰 당신이 당신 안에 있다. 남을 너무 엿보지 말고, 훈수 대신에 당신의 길을 묵묵히 나아가라. 세상 풍경을 온전히 즐기자. 지금이 아니면 늦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