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팔만대장경

2024-12-04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일본 정부가 도쿄 한 사찰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 목판 인쇄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에 4일 서경덕 교수는 SNS에서 “한국의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도쿄 사찰인 조조지(增上寺)가 소장한 ‘불교 성전 총서 3종’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을 선정했다. 조조지 ‘불교 성전 총서 3종’은 중국 남송 시대(12세기)와 원나라 시대(13세기), 한국 고려 시대(13세기) 때 대장경 목판으로 찍은 불교 인쇄물로 일명 고려대장경으로 불린다. 고려대장경은 우리나라 해인사에 소장돼 있는 ‘팔만대장경’을 말한다. 정식 명칭이 고려대장경이고,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집요한 요구

팔만대장경은 제작 이후 여러 차례 우리나라에서 사라질 위기를 겪었다. 그 첫 번째는 세종대왕 시절이다. 당시 일본 무로마치 막부 시대 주고쿠 지방인 승의 슈고 다이묘인 오우치는 대장경판에 관심을 가졌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조선에 팔만대장경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기조이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 이를 반대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 사신들은 단식 투쟁까지 했다. 이에 세종대왕은 잠시나마 대장경판을 일본에 넘겨주려고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 대장경판을 요구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대장경판의 유실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가토 기요마사가 해인사를 불태우려고 했지만 의병 광재우, 김연, 정인홍 등이 일어났고, 해인사에서도 승려 소암이 승병을 모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일본제국주의는 팔만대장경판을 일본으로 유출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소실될 뻔한 또 다른 사건이 있었는데 6.25 전쟁 당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면서 북한군 빨치산은 산중으로 들어갔고, 주로 불교 사찰로 들어갔는데 그러자 연합군은 불교 사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해인사 역시 파괴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령이었던 김영환 장군이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알고, 주변 상공을 선회하면서 무력시위를 했다. 이에 빨치산은 해인사에 철수하면서 대장경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