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병자호란, 치욕의 역사는 오롯이 국민의 몫

2024-12-07     김진혁
조선 인조 14년 청나라가 침입한 전쟁 왜 국가는 존립해야 하는가? 피로인이 겪는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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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추운 12월이 오면 잊지 못할 비극의 역사가 생각난다. 바로 병자호란이다. 1636년, 후금에서 중국의 주인이 된 청나라의 태종이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불과 40여 일 만에 조선을 항복시켰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후금의 침입을 막았지만 그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청태종은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침입에 나섰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은 성안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官家)와 사가(家庭式)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청나라가 침략해 온다는 소식에 인조는 곧장 남한산성으로 도망가서 은거했다. 그곳에서 조정은 척화냐 주화냐 논쟁하다가 결국 삼전도의 굴욕으로 항복한다. 지배층은 민중의 안위보다는 왕실의 보존과 지배층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더 컸고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갔다. 병자일록에 따르면 남한산성에서의 방어가 길어지면서 굶주림과 추위와 싸워야 했다. 성안에 물건들이 궁색하여, 땔감과 풀도 없어 소와 말이 죽어갔고 군사들도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 남한산성 밖도 청군에 의해서 무지막지한 인간사냥이 자행됐다. 청나라는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이 세운 나라다. 북방 유목인들은 다른 부족을 침략해서 생활 물품과 인력을 빼앗아 생활을 영위하는 족속이다. 청군에게 잡혀간 민간인을 피로인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게 끌려간 피로인 수는 약 50만 명으로 추정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000만 명 남짓이었다. 피로인들의 처지는 비참했다. 예조좌랑 허박은 "피로인이 되면서 겪는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하고, 그것이 화기를 해치는 것 또한 죽음보다 더 심하다." 라고 말했다. 탈출이나 속환을 통해 조선으로 귀환할 때 고통도 계속됐다. 병자록을 지은 문신 나만갑(羅萬甲)은 억류된 피로인들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적진 가운데 조선인 피로인이 절반인데, 그들이 무엇인가를 호소하려 하면 청군이 철퇴로 때려죽인다. 참혹한 진상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청군은 전쟁에 쓰려고 남자들을 잡아갔는데, 이들은 청나라의 또 다른 전쟁에 끌려가 희생양이 되었다. 또한 젊은 여자는 닥치는 대로 끌고 갔다. 당시 사로잡힌 여자들 가운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청군은 여자들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을 죽이거나 버리고 갔다. 청군은 피로인들을 대상으로 소위 노예장사를 했다. 조선에서 피로인 가족을 송환해 가려면 거금을 주고 데려가야 했다. 그 금액은 당시 집 한 채 값도 넘는 거금으로 일반 민중들은 꿈도 못 꾸었다. 비록 거금을 주고서 데려와도 화냥년이라고 해서 남편들이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정조를 잃은 여자들은 자살을 하거나 돌아온 여자들을 화냥질했다고 하여 많은 핍박을 받았다. 나라에서는 나라가 약해 잘못한 것임에도, 사근교(살꽂이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청나라 사람과 살았던 것을 깨끗하게 하기로 하였다. 병자호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성리학적 명분론이 도그마가 되어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넣던 지배층의 무능을 없애야 한다. 둘째, 평화를 원하려면 강해야 한다. 세계 역사 어디를 봐도 대화로 전쟁을 막은 사례는 없다. 있다면 대화로 포장된 항복뿐이다. 셋째, 세상이 아무리 편해도 전쟁을 잊지 말아야 하고, 국부를 늘려야 한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민족은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해서 살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