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차세계로의 산티아고 순례길 마지막회] 카미노는 빛을 따라 걷는 36일간의 대장정... 내 인생의 ‘다시보기’이자 ‘미리보기’였다

- 걷는 내내 만난 수많은 인연...카미노 천사들 - 현재의 삶에 더 많이 감사, 베풀며 살아야 함을 깨달아 - 완주 순례 일기, “발끝에 확신이 닿는 곳, 그게 내 빛이었다”

2023-12-14     양시영 인플루언서
35일

[파이낸셜리뷰=양시영 인플루언서] 늦봄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해 어느덧 여름이 되었다. 스페인도 한국처럼 열대야가 심해 근래 계속 밤잠을 설쳤지만, 지금껏 이 길을 걸어온 시간의 흐름이 계절로 오롯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번 열대야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카미노 천사들은 늘 나와 함께였다

발걸음은 가볍게, 마음은 단단하게 35일 차 순례길을 걷던 중, 뜻밖에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미국에서 온 알버트와 그의 가족이었다.

오피노
오피노

알버트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돼 보이는 귀여운 어린이였는데, 부모님, 누나와 함께 사리아(Sarria)에서부터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잠깐 알버트의 식구들과 일행이 되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오늘 구간의 반 이상을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사실 난 사리아 이후 순례객이 너무 많아져 걷는 내내 불평불만을 수없이 늘어놨었다. 하지만 알버트 가족 덕분에 수많은 카미노 천사가 나와 함께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고, 이들과 남은 길을 같이 걸을 생각에 이젠 마음마저 든든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약 1시쯤 오늘의 목적지인 오피노(O Pino)에 도착했다. 이날도 나는 선착순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고, 운 좋게 수많은 2층 침대 중 단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순례길에서의 마지막 손빨래까지 마친 뒤엔 일행과 함께 저녁을 먹었고, 내일이 마지막 순례라는 사실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일찍 잠을 청했다.

순례길은 내 인생의 다시보기이자 미리보기였다

마침내 순례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대부분 순례자는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정오에 진행되는 향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5시부터 길을 나서곤 한다. 하지만 나는 산티아고에서 며칠 묵을 예정이라, 여유로운 마지막 순례를 즐기고자 느긋이 하루를 시작했다.

멀리
마침내

작은 마을의 성당에 들러 충분한 기도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 질리도록 먹었던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을 마지막으로 음미하기도 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순례길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번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 인생의 미리보기이자, 다시보기이기도 했다. 36일간 걸으며 나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하기도, 평소 스스로 단점으로 여기던 모습들이 가감 없이 드러나기도 했다.

완주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다고들 하던데, 나는 이번 순례를 통해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미숙한지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삶에 더 많이 감사하고, 다른 이들에게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 또한 자연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차분하고 겸허한 마음이 들었던 완주의 순간

어느덧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다다랐고,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인 대성당의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은 빨라져 거의 뛰는 지경에 이르렀고, 7년 전 산티아고에 울려 퍼졌던 피리 소리가 들리자마자 괜스레 눈앞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차리니, 엄청난 규모의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꼬박 36일을 걸어 이곳에 다시 왔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간 걸으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는데

오히려 완주의 순간에는 더욱 차분해지고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아름답고도 충만한 시간을 성당 앞에서 보낸 뒤, 순례자 사무소로 향해 완주 증서를 받았고, 여느 때의 순례 일상과 다름없이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에는 며칠 전 초대받은 순례자 파티에 참석했다. 가 보니 익숙한 얼굴의 순례자들이 각자의 순례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축배를 들고 있었고, 나도 그간의 여정을 회고하며 완주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아름답고
성전
완주의

다음 날엔 일찍부터 대성당으로 향했고, 감사의 마음을 듬뿍 담아 미사를 드렸다. 미사가 끝난 뒤엔 한동안 성전에 앉아 마지막 순례 일기를 썼고, 은총으로 가득한 이 도시를 둘러보며 36일간의 순례를 마무리했다.

아래의 글은 내가 2023629일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쓴 순례 일기의 일부분이다. 당시 벅차도록 느꼈던 순례의 가치와 완주의 기쁨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짧고도 길었던 여정 위 마침표를 찍으려고 한다.

나는 내 생애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다. 라바날 델 카미노 수도원에서 만난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카미노는 빛을 따라 걷는 여정이라고 하셨다. 동쪽에서 서쪽,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땅끝까지

여러분은 카미노에서 혹은 인생에서 어떤 빛을 쫓고 계신가요?” 신부님의 물음에 마냥 성취감에 취해 걷던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걷는 동안 과거는 홀연히 흘려보내고, 현재는 과감히 즐기고, 미래를 나만의 방식대로 그려본 뒤,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빛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해 봤다. 별이 쏟아지는 곳이라는 뜻의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마침내 산티아고 사도를 마주하니, 자연스레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었다. 발끝에 확신이 닿는 곳, 그게 내 빛이었다. 인생이라는 길을 걷는 모든 순례자가 자신만의 빛을 향해 가길 응원하며, 2023년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려고 한다. 그럼 부엔 카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