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가발 산업 그리고 아줌마 파마
2023-12-14 어기선 기자
중공의 핵실험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인 1937년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쌀 2가마니 가격으로 파마 서비스가 제공됐다. 파마는 부유층 여성의 상징이 됐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파마는 부유층 여성들이 하는 헤어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64년 10월 중공이 핵실험을 강행했다. 당시 냉전 시대였기 때문에 미국은 중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가발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품목 중에 가발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 가발시장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중국산 가발이 사리지게 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수입선 다변화가 필요했다. 이에 주목을 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손기술이 좋기 때문에 가발 품질이 우수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결이 상당히 좋았다. 즉, 원료는 물론 품질도 상당히 좋기 때문에 미국 가발유통업체들은 한국산 가발에 대해 열광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은 가발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YH무역이었다.가발 수요 늘어나자
문제는 미국의 가발 수요가 늘어난 반면 우리나라 가발제조업체들은 원료 공급 부족 사태에 시달리게 됐다. 이것을 타개하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게는 5만 가닥 ~ 많게는 30만 가닥의 머리카락이 필요했다. 이에 가발제조업자들은 미용사들을 고용했다. 그들을 지방이나 시골로 급파해서 사람의 머리카락을 구해오게 한 것이다. 당시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미용사들은 머리카락을 구하고, 머리카락을 자른 여성들에게 파마를 무료로 해줬다. 그러면서 파마가 중년 여성의 표준 헤어스타일이 된 것이다. 그런데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료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왜냐하면 가발산업은 노동집약형 산업이다. 즉, 인건비가 조금이라고 더 저렴한 곳으로 공장이 이동하기 마련이다. 베트남 전쟁이 종료되면서 동남아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해결되면서 미국 가발산업 투자자들이 공장을 한국에서 동남아로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 우리나라는 인건비 상승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가발이 점차 사양산업이 되면서 YH무역도 1979년 공장 문을 닫았고, YH무역 여공 사태가 발생했으며, 김영삼 신민당 당시 총재 제명 사건이 발생했고, 부마 항쟁으로 이어지고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가발산업이 사라지면서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팔아서 생계를 꾸릴 수 없게 됐지만 이미 한번 고정된 헤어스타일을 바꿀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러보니 미용실에서 “늘 하던 대로 해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면서 아줌마 파마는 ‘아줌마’의 상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