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3저 호황
2024-01-03 어기선 기자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의 경제가 그때까지만 해도 고도성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플라자합의를 이뤄냈다. 플라자합의는 일본의 엔하가치를 높이고, 달러화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추는 것이었다. 그 결과 엔고 현상이 발생했으며 일본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수출은 어려워졌다. 반면 한국 원화는 저평가 되면서 가격경쟁력을 갖추게 됐고, 이에 수출이 증가했다. 이와 더불어 1970년대 말 발생했던 2차 석유 파동이 세계 각국의 중동산 석유 의존도를 낮추게 되면서 중동 산유국들 역시 덩달아 원유 생산량을 늘리면서 유가 하락을 주도했다. 여기에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금리를 인하하면서 국제금리 역시 10%대로 하락하게 됐다.단군 이래 최대 호황
이처럼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 등 3저 현상이 발생하면서 우리나라 경제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연평균 12.1% 성장하게 됐다. 그에 따라 실업률도 4.0%에서 2.5%로 떨어졌다. 그러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면서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산층이 형성됐다는 것은 곧 소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수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그에 따라 공장 가동률도 다시 높아지는 등 선순환 경제 구조를 갖게 됐다. 그러자 덩달아 주식시장화 활황을 보이면서 종합주가지수가 85년의 130포인트에서 89년 3월의 1000포인트로 7배 넘게 상승하고 주식투자인구도 20배 넘게 늘어나는 대기록을 세웠다.노동현실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노동 현실이었다. 3저 호황 당시에도 노동시간은 평균 3천시간이었다. 그리고 당시 노동자의 노조 가입에 대해 정부가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노조가 통일민주당 혹은 평화민주당과 합세를 해서 반정부 투쟁에 나설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노동 환경은 그야말로 열악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은 보도 검열로 언론의 자유를 잃어버렸다. 이는 결국 노동자의 노동 환경 개선이 크게 이뤄지지 않았다. 3저 호황으로 인해 나라의 부는 점차 축적되고 있지만 그 결실을 제대로 따먹지 못하는 근로자들은 점차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그것이 결국 6월 항쟁에서 ‘넥타이 부대’로 표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