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김육 그리고 대동법

2024-01-08     어기선 기자
김육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김육은 후기 통틀어 명재상이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이 멸망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200년 더 이어지게 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대동법을 추진하면서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김육만한 명재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대동법 시행 뿐만 아니라 인쇄업을 하면서 의학서적 등의 보급과 금속활자 계승에도 힘을 썼다.

효종 때 영의정에 올라

인조 때부터 조정에 들어갔으며 효종 때 김육은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면서 대동법과 군역 등 공납 문제를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달라고 효종에게 요청을 했다. 결국 효종 2년(1651년) 7월 호서대동법이 시행됐다. 이것은 김육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산림은 여전히 대동법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김육은 계속 추진해 나갔고, 효종은 김육의 손을 들었다. 김육은 또한 화폐 유통에 적극적이었다. 효종 즉위 당시 진위사로 청에 다녀오면서 동전 15만푼을 바꿔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화폐 보급에 강하게 밀어붙였다. 다만 화폐 유통이 쉽지 않은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김육은 효종 6년(1655년) 병석에 누웠지만 호남 대동법을 요구했다. 호서대동법 시행으로 충청도 부담이 크게 완화되자 호남으로 확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 호남대동법이었다. 김육은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하남대동법에도 온 신경을 기울였다. 김육은 향년 78세 일기로 사망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호남 대동법을 걱정했다.

대동법, 조선시대 뒤바꿔

김육의 이런 노력은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됐고, 그것은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모두 바꾸게 만들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공납의 폐단이 어느 정도 완화됐고,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안정되게 됐다. 아울러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됐다. 이와 더불어 ‘모내기(이앙법)’가 시행되면서 쌀의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노동 대비 산출이 높아지면서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구가 증가하게 됐다. 이런 대동법이 구한말에 들어오면서 붕괴가 됐고, 그러자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발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