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미군정 미곡수집법

2024-01-09     어기선 기자
미군정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이후 20여일이 지난 9월 8일 서울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군정이 설치됐다. 그리고 10월 5일 ‘일반고시 제1호’를 발표했다. 그것은 일제가 실시했던 강제공출제와 배급제를 폐지하고 쌀 시장을 개설하는 것은 물론 자유화하는 조치였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쌀은 강제적으로 공출을 했고, 공출에 따른 배급제를 실시했다. 즉, 농민들은 쌀을 생산했지만 시장에 내다팔 수 없었고, 공출이라는 형식으로 강제적으로 빼앗겼고, 그리고 먹고 죽지 않을만큼 쌀의 배급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쌀 시장 자유화 조치는 농민들에게는 환영할만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수요와 공급 원리 깡끄리 무시

10월 20일에는 ‘자유시장 설치에 관한 건’에 대한 일반고시 제2호를 공포하고 쌀 시장개설과 쌀 유통거래를 전면 자유화시켰다. 문제는 우리 국민이 자유시장 경제와 가격의 원리 등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급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가 늘어나면 가격이 급등하기 마련이다. 미군정의 쌀시장 자유화 조치는 ‘매점매석’ 현상이 발생하면서 쌀이 시장에 사라지는 ‘쌀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해방이 되면서 해외에 있던 사람들이 귀국을 했고, 북한에 있던 사람들 역시 남한으로 넘어오면서 대략 100만명이라는 인구가 증가했다. 쌀은 없는데 소비는 늘어나니 당연히 쌀값이 폭등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그해 11월 결국 자신들이 내걸었던 쌀 시장 자유화 조치는 잘못된 정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쌀 자유시장 폐쇄

미군정은 그해 11월 ‘일반고시 6호’를 발표하고 쌀 자유시장을 폐쇄했다. 그리고 1946년 1월 25일 미군정청 법령 제45호로 ‘미곡수집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2월 1일부터 1845년산 미곡수집에 나섰다. 하지만 목표량의 12.7%밖에 수집하지 못한 대실패였다. 이에 결국 공권력을 이용한 강제수집을 위해 나서면서 1946년 5월 양곡 관리기구로 ‘중앙식량행정처’를 신설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1947년산 쌀을 수집목표량 97%를 거두는 성공을 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양곡관리정책을 수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