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대약진운동
2025-01-24 어기선 기자
소련 거울 삼아
1953년 중국은 스탈린주의적 발전 모델을 구체화한 중공업 우선 정책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농업분야에서는 초급 합작사를 통해, 상공업분야에서는 집단화 완료를 통해 초보적인 공업화라는 성과를 이뤄내겠다는 목표를 삼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큰 성과를 보지 못했고, 경제적 불균형만 형성됐다. 특히 1956년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저하로 공업 발전에 필요한 자본 창출이 어려웠다. 소련은 1930년대 집단농업을 도입해서 농업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얻었고, 그 자본을 통해 공업화를 이뤄내서 성장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소련을 지원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중국은 소련을 롤모델로 삼아 농업을 발전시켜 자본을 마련하고, 그 자본을 통해 공업화를 이뤄내려고 했지만 농업 정책부터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비판이 이어졌고, 1957년 5월 마오쩌둥은 공산당을 비판하고 자유화를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반우파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사회에서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지식인들은 탄압을 받으면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후 1958년 급진적인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을 채택하게 되면서 중국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소련 없이
1958년 제2차 5개년 계획에서는 소련의 도움 없이 농업 및 공업 등 경제분야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모순을 제거하려고 했고, 인간 개조에 나섰다. 이에 삼면홍기(三面紅旗) 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人民群众公社) 운동이 추진됐다. 대약진운동으로 사회주의 건설 속도를 가속화하고, 인민공사를 조직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하고자 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당시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하자는 구호를 내세웠고, ‘더 많이, 더 빨리, 더 훌륭히, 더 절약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이에 공업과 농업 생산 지표를 높혔다. 겉으로는 공업과 농업 생산 지표를 달성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보고서 등에서는 목표 생산량을 달성했다고 기재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목표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철강 생산량을 따라잡기 위해 전국 곳곳에 재래식 방법의 100만개 소형 제철소를 만들어 철을 생산했지만 철강 품질이 낮아 아무데도 쓸 수 없었다. 농업의 경우 증산에만 몰두하면서 농작물을 틈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심었다.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농작물이 결실을 맺을리 만무했다. 즉, 구호는 거창했지만 현실을 전혀 외면한 그런 대약진운동이었다. 여기에 중공업 우선 정책, 대규모 수력, 관개 사업 시행 등에 인력이 투입되면서 농업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생산량 역시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에는 농공업 생산 총액이 2배 증가했다는 식으로 기재됐다. 그것은 서류상에서만 가능한 수치였다. 여기에 1959년 하반기부터 3년간 계속된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 때문에 농업 생산은 대풍작이었던 전년도의 2억 2,500만 톤에서 1960년에는 1억 8천만 톤으로 크게 감소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1960년 이래 경제 원조가 중단되면서 수천만명이 굶어죽었다. 이런 악재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정치적 기반을 잃어버리게 됐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되찾기 위해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그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문화를 수천년 퇴보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