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식민지 수탈의 도구가 된 일제시대 증권시장
2025-02-01 김진혁
일본 자본으로 설립된 제조회사 주식공모 활발
국내 최초의 근대적 거래소, 조선취인소 개설
미두 투기로 거부가 된 반복창, 결국 몰락의 길로
[파이낸셜리뷰] 인천미두거래소는 쌀, 콩 등 곡물을 거래하는 상설시장으로 일본인들이 1896년 5월 설립하였다. 구조와 거래방식은 오늘날의 선물시장 형태다.
인천미두거래소가 설립한 취지는 조선 쌀값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이지만, 실상은 조선의 쌀과 돈을 수탈하기 위함이다.
일본인들은 미두거래소로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미두투자로 큰 돈을 번 사람이 많다’라는 소문을 퍼뜨려 전국의 지주와 지방부호들이 인천으로 몰려왔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 '미두왕'으로 유명세를 떨친 반복창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21살의 청년 반복창은 미두시장에 뛰어든지 1년 만에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미두의 왕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1929년 봄, 반복창은 S여자전문대학 음악과를 중퇴한 인텔리 여성과 결혼한다. 최고급 호텔인 서울 조선호텔에서 당대 최고의 호화결혼식을 올렸다. 인천에서 상경하는 하객들을 위해 2등 객차 여러 칸을 왕복으로 전세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이 참석했는데 피로연 등 결혼식 당일 비용만 3만 원(현재가치 30억 원)에 달했다.
그는 단 한 번의 거래로 18만원(현재 시세:약 180억 원) 가량의 돈을 벌어들이는가 하면, 정확히 쌀 시세를 예측해 단 몇 년만에 재산을 40만 원(현재시세:약 400억 원)까지 불렸다. 반복창이 미두로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그를 '미두신'이라고 부르며 추종하는 세력들도 등장했다.
그러나, 1922년부터 그는 지속적으로 미두 시세 예측에 실패하며 계속 손해를 보게 되었고,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투기적 거래'를 감행하게 된다.
그 결과 일본인들의 담합으로 지속적으로 실패하여, 불과 2년 만에 전 재산을 탕진하고 1938년 마두시장 주변을 맴돌다 1938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역사와 반복창을 사례를 통해 투기적인 시장 참여는 결국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우리 속담을 기억하고 투자자들이 지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한 급한 마음의 ‘투기적거래’는 삼가야 한다.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는 1896년에 설립된 조선은행이다. 1898년 부하철도회사, 1906년 한성농공은행 등의 금융기관 설립이 잇따랐다. 이들 회사는 대부분 주식 모집 방법으로 설립되었다.
1920년 한국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경성주식서물거래소가 개설되었다. 거래 방법은 청산거래와 실물거래 두 가지로, 청산거래가 대부분이었고, 거래 종목은 일본 도쿄거래소와 오사카거래소의 상장주식이었고 한국 주식으로는 경취주(경성주식현물취인 시장주)였다.
조선인 투자자들로 동아증권의 조준호 사장과 금익증권의 강익하 사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1929년 세계대공황 등이 발생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아, 주식거래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1945) 등 침략전쟁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일본 자본으로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했다. 이때 설립된 제조회사들은 전쟁특수를 맞아 주가가 상승하고 거래량도 늘면서 성장 가도를 달렸다.
1932년 영업을 개시한 조선취인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법적 근거를 갖는 증권거래소다. 조선취인소에는 미두부와 증권부를 두었는데 미두부는 인천미두시장을 폐쇄하고 거래소 내 부서로 편입한 것이다.
조선취인소는 일반 주주의 모집으로 설립된 주식회사로 서울 명동에 사옥이 있었다. 당시 한국기업으로는 경성방직(현 경방), 경성전기, 조선기계, 조선맥주 등으로 주식거래가 미미했고,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조선증권취인소는 폐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