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구호기사단

2025-02-15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구호기사단은 유럽 십자군 전쟁 시기 결성된 가톨릭 기사수도회를 말한다. 성전기사단과 함께 중세시대에 맹위를 떨치던 세력이다. 흔히 몰타기사단으로 알려졌다. 성전기사단은 프랑스 국왕에 의해 해체 수순을 벏아야 했지만 구호기사단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국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으며, UN 가입 자격을 갖고 있다.

병원에서 시초

구호기사단은 600년 예루살렘에 설립된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시초이다. 원래 구호활동을 담당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 때에도 의료봉사활동을 했다. 구호기사단은 전투가 있으면 전투를 치렀고, 전투가 없으면 의료봉사를 해왔다. 이것이 구호기사단이 지금까지 존재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초반에는 신앙심 가득한 귀족들이 구호기사단에 합류했지만 점차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차남 등 귀족 자제들로 채워졌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사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구호기사단은 수백명에 불과했고, 맘루크 왕조의 군대는 수천에 해당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 1세는 트리폴리 백작 보에몽 1세 편지를 위조해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 항복하라”는 편지를 비둘기를 통해 성안으로 보냈다. 이에 기사단은 속아서 성을 내준 것으로 유명하다.

예루살렘이 무너지자

1291년 예루살렘 왕국 성지 영토가 모두 상실되자 구호기사단은 로도스섬을 거점으로 삼았다. 교황청과 프랑스 왕에 의해 성전기사단은 철저하게 해체됐지만 구호기사단은 최전선에서 이슬람과 맞서는 역할을 했다. 그러자 성전기사단의 재산 상당량이 구호기사단에 흡수되면서 그 세력이 확장됐다. 15세기에는 오스만제국에 반발해서 오스만제국 선박에 대한 해적질을 자행했다. 당시 이교도에게 가하는 죄악은 죄가 이나라는 인식 때문에 구호기사단의 해적질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요새를 지켜내면서 기사단장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추기경 작위까지 받았다. 1522년 술탄 쉴레이만 1세가 공략을 시도했는데 이때 병력이 10만명이고, 함선 300여척이 동원됐다. 구호기사단은 700여명이었고 로도스 주민 7천여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6개월에 걸친 기나긴 수성전을 벌였다. 인해전술에 점차 밀리기 시작하자 쉴레이만은 기사단에게 항복을 하면 모든 무기와 군기를 가진 채로 섬을 나가게 해주겠으며 기사단과 함께 섬을 떠날 주민들의 안전도 보장한다는 제안을 했다. 기사단은 로도스 주민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판단해서 결국 성문을 열었고, 기사단은 쉴레이만이 제공한 배 50척을 타고 요새를 빠져 나갔다.

몰타 기사단

기사단은 그 이후 시칠리아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배려로 1530년 몰타섬을 할양받았다. 그리고 오스만제국과 또 다시 전투를 벌였다. 오스만제국이 여러차례 공격을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를 했다. 그러면서 오스만제국의 위협이 사라지게 됐다. 그러자 몰타기사단은 해적질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몰타섬은 아랍과 아프리카 노예를 유럽에 공급하는 시장이 번성하게 됐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베니스와 나폴리 등 가톨릭 국가 선박들도 해적질을 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의 일환으로 몰타섬을 침공해 점령하면서 구호기사단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기사단 국가는 멸망했다. 그러다가 1834년 로마로부터 기사단 지부를 만드는 것을 허가받았다. 이때부터 구호기사단은 군사적인 역할을 아예 벗어던지고 구호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즉, NGO 단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우표를 판매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