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한국 증권투자 흑역사, 역사는 반복된다.
2025-02-22 김진혁
ㅇ 1962년 증권파동: 패가망신 첫 번째 사건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미두선물투기로 지역유지들이 거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투기꾼은 일제 시대 반복창(潘福昌)이다. 12살 때 일본인 미두(米豆) 중매점(仲買店)에 사환으로 들어갔다. 푼돈 모은 전 재산 500원을 쌀과 콩의 가격 시세를 결정하는 미두시장(지금 선물거래)에 투자했다. 그런데 그가 찍는 대로 미두 시세가 움직이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졌다. 1920년 그는 1년 만에 무려 40만 원(현 시세 400억 원)이란 거금을 벌어 단숨에 최고 갑부 대열에 올라섰다. 부를 거머쥔 그는 당시 서울 장안의 미인으로 이름났던 김후동(金後童)과 조선호텔에서 초호화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 비용만 지금 돈으로 30억 원이었다. 결혼식에 그 당시 정계인사들, 탑급 인재들도 다 모였다. 인천에 대저택도 짓기 시작했다. 31살 때, 사람들은 그를 '미두신(米豆神)' '미두왕(米豆王)'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1년 뒤 그는 완전히 망했다. 미두 시세 예측에 거듭 실패해 손해를 보고, 그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투기적 거래'를 감행한 끝에 전 재산을 탕진했다. 이후 이혼당하고 사기 사건에 휘말렸고 중풍과 정신병에 걸렸다. 한 때 신으로 불렸던 그는 "오른다", "내린다." 라고 중얼대며 정신병자처럼 미두취인소 주변을 왔다 갔다 하다가, 1938년 40세에 어느 단칸방에서 최후를 맞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증권투자로 인해 패가망신 한 대표적인 사례는 1962년 증권파동이다. 당시 증권거래소는 서울 명동에 있었고 상장주식은 겨우 12종목이었습니다. 이 중 대증주(증권거래소), 연증주(증권금융), 한전주(한국전력)이 전체 거래량에 93%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급격히 증가한 통화량과 부동자금이 맞물리면서 1962년 증권파동을 만들게 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책동전(세력끼리 서로 주가 대결양상)이 발생했고 대증주의 주가는 단 몇 개월 만에 120배까지 끌어 올려졌다. 이렇게 주가가 폭등하니 수천, 수만 명이 주식시장으로 뛰어들었고 주식 투자하면 대박난다는 소식에 명동 증권시장엔 돈이 넘쳐났습니다. 소 판돈, 달러 시장자금, 고리대금자금 등이 증시로 달려들었고 당시 외상주문까지 등장하며 주가는 끝없이 상승할 기세였다. 하지만 5월 책동전이 종국에 이르며 5월 증권폭락이 이루어졌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당시 정부는 증시파탄과 중소투자자(개인투자자)의 파산을 막기 위해 긴급자금을 의결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였다. 수천~수만 명의 개인투자자가 파산했다고 한다. 그 여파로 10년 넘게 한국증권시장은 주식시장으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주식투자는 패가망신한다.’‘주식하면 사람이 변한다’ 등 주식투자는 탐욕과 세력의 노예가 되기 쉽다. 개미 털기, 양털 깎기 등의 비하하는 말도 생겼다. 1962년 증권파동은 우리나라 증시 역사에 큰 오명으로 남겼다. 주식에 관한 지식과 정보도 없이 오직 ‘남이 ~하더라’‘외상거래라도 주식하면 돈 된다’부화뇌동의 결과로 경제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