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작가의 어설픈 제주이야기 9] 터무늬 있는 그곳 모슬포 #2
- 모슬포에서 만난 지인과의 맛집 회동
- 전분 공장이 카페가 된 사연과 시그니쳐 이야기
2024-02-26 김민수 여행작가
[파이낸셜리뷰=김민수 여행작가] 모슬포 그러니까 대정에 아는 사람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지인의 처남으로 술 한잔하며 알게 된 사이다. 그는 제주에 일 때문에 내려왔다가 타의 70, 자의 30으로 발이 묶였다.
대정읍 동일리의 빌라 건축에 참여했다가 공사대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빌라 한 채를 점유한 채, 미수금을 월세 명목으로 까나가며 2년째 사는 중이다. 그는 입주가 되는대로 남은 대금을 상환한다는 조건을 믿었고 한편으로는 제주 생활이 재미있다고도 했다.
그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눈에 띄는 세간살이라고는 소파와 TV 그리고 냉장고가 고작이었다. 마치 분양을 끝내고 철수를 막 시작한 모델하우스 같은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뭐, 결정 난 것이 없으니 어정쩡할 수밖에요. 그래서 뭘 좀 사놓고 꾸미기가 그래요.”
여행자와 주민 사이에 동네 개와 마을 길이 있다
그를 따라 동네로 나섰을 때 작고 하얀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어정거렸다. “삼일아!”하고 불렀더니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이내 골목으로 사라져갔다.
“생일이 3일인가?”
“아뇨, 집 나간 지 3일 만에 돌아와서 삼일이래요.”
바닷가 마을인 줄 알았던 동일리는 내륙으로 깊게 들어와 있었다. 마을 길은 밭 사이에 놓였다. 너른 땅은 농사로 쓰고 자투리 공간에 집을 내어 사는 듯했다.
“저 밭에 심은 것이 마늘인가?”
“마늘도 있고, 양파도 있고..”
여행자와 주민 사이에 동네 개와 마을 길이 있었다. 늘 마주치는 개, 대충 지은 이름, 감흥 없는 마을 길. 삶 속으로 들어와 앉는 존재가 많을수록 생각이 편안해지고 호기심이 옅어진다.
모슬포항에는 유명한 고등어 횟집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과거 단골이다. 고등어회도 기름지고 맛있었지만, 기본 찬으로 제공되는 제주식 돼지 산적 때문에 더욱 애정했던 곳이다. 덕분에 생선회 다음에는 반드시 고기를 먹어야 하는 몹쓸 루틴조차 여지없이 채워지곤 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제주도로 대표되는 고등어회는 모두 자연산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다. 통영 앞바다 욕지도에서 양식된 고등어가 제주도로 넘어온다. 수족관에 있는 생산지 표시에도 제주산이 아닌 국내산으로 되어있다.
순전히 돼지 산적 때문이었다. 그는 별로 내키지 않은 듯했지만, 여행자의 바람에 한풀 접었다. 홀은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고등어회의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고 바라던 돼지 산적은 상 위에도 메뉴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씁쓸해하는 나를 위로했다.
“그냥 2차로 고기드시러 가시죠.”
여행자도 주민도 아닌 그와 등갈비를 먹었다. 두 병째 소주가 바닥을 보였을 때, 그가 말했다.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커피 어떠세요?”
순간 메가커피나 빽다방 아니면 컴포즈쯤 될거라 짐작했다.
‘어쩌면 내 여행에서 오늘 하루쯤은 지워도 되지 않을까?’
그가 안내한 곳은 마치 학교처럼 큰 건물이었다. 빌라 단지보다는 동일리 벌판과 훨씬 잘 어울려 보였다.
전분공장이 카페가 되다
카페 ‘감저’는 옛 전분 공장을 레너베이션한 곳으로 부지만 무려 2,000평에 이른다.
과거 공장 운영주의 2세 김재우 대표가 한동안 방치되었던 시설을 부인과 함께 10년 가까이 리모델링했단다. 부부는 옛 건조장 건물은 카페, 창고는 갤러리로 변신시켰다. 카페 내부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입구로 들어서니 천정까지 닿을 듯한 커다란 전분 기계가 우뚝 서 있었다. 수십 년은 되었을 기계의 역사는 카페의 가치를 상징하는 듯했다.
카페는 넓고 쾌적한 공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심함이 돋보였다. 유리 벽 너머 시멘트 블록이 투박한 모습으로 남아있는가 하면 당장이라도 인부들이 달려들어 작업을 개시할 것 같은 공장의 시설물 또한 원형으로 노출돼있었다.
카페 옆 건물의 타이틀은 ‘감저팩토리’다. 실제로 사용하던 기계와 장비가 고스란히 놓여있는 내부는 마치 박물관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 대표는 ‘감저팩토리’가 화산석과 검은 모래로 시공된 건물이라 했다. 제주의 풍토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돌 건축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파란만장 감저 이야기
고구마를 발효한 후 증류하면 95% 농도의 무수주정(알콜)을 얻게 된다. 일제는 제주도에 고구마재배를 강요했고 많은 주정 공장을 세웠다. 주정으로 항공기 연료로 쓰일 부탄올과 아세톤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고구마 생산량이 많아지니 자연 전분 공장도 생겨났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한동안 제주도는 우리나라 고구마의 최대 생산지였다.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저’라 하고 감자는 ‘지슬’이라 부른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감저는 보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고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주민들의 겨울 식량을 대신했다.
70년대 중반부터 농업구조가 서서히 감귤 중심으로 바뀌면서 감저의 재배면적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90년대 들어 값싼 수입 전분이 시장을 차지하면서 제주의 전분 공장은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다.
카페 ‘감저’에 들어서는 순간 여행이 찾아왔고 김 대표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이 깊어짐을 느꼈다.
“문화는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이 좋잖아요. 조금은 어려워도 상업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릿느릿 만들어 갈 겁니다.”
여행자도 주민도 아니라 했던 그가 문득 여행자 또는 주민으로 여겨졌다.
“특별한 일없이 하루를 보내지만 그래도 모슬포가 좋아요.”
옛 전분 공장은 고양이가 지내기에 좋아 보였다. 10마리도 넘을 녀석들이 제집인 양 터를 잡고 있었는데 부인은 고양이에게 진심으로 대했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와서 고양이 이야기도 나누고 고구마 라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1년 후 실제 이루어짐)
터무늬 있는 이곳 모슬포, 돌아가기 전, 삼일이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