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CJ제일제당 햇반, 210g 된 사연
2024-02-26 어기선 기자
식사량 엄청났던 한국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사량은 엄청났다. 현대인들의 2~3배 정도의 식사량을 보였다는 것이 기록 곳곳에 남아있다. 특히 중국, 일본, 서양 모두 공통적으로 ‘한민족은 식사량이 많다’고 기록돼 있다. 고구려 우물 중 밥그릇은 1300g이었다. 또한 고구려 벽화에서도 대식가라는 것을 보여줬다. 무용총 접객도에는 밥그릇이 남달리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먹었다고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 때 ‘쇄마록’이라는 책에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쌀을 먹는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현재 먹는 1공기의 2배 정도의 양이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을 점령했을 때 조선군이 군량미를 계산해보니 1달 정도로 생각했다. 즉, 1달만 버티면 왜군은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왜군의 식사량이 조선군의 1/3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훗날 조선군이 왜군의 식사량을 알았을 때 지구전을 위해 일부러 식사량을 줄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왜군은 평소 먹은대로 먹었다고 한다.1960년대까지만 해도
구한말 서양인이 조선땅을 밟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이 우리 국민의 식사량이었다. 특히 양반은 물론 천민까지 식사량이 어마어마했다. 고봉밥이었기 때문에 현재 식사량의 2배 혹은 2.5배 정도라고 볼 수 잇다. 일제강점기 때는 쌀을 수탈했기 때문에 보리·감자 등 부피가 큰 식품을 먹었다. 그러던 것이 1950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식사 문화가 확연히 바뀌게 됐다. 무엇보다 전국토가 황폐화되면서 쌀 생산량이 일제강점기보다 낮았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절미운동’을 벌였다. 밥을 덜 먹자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실패했다. 그러다가 1956년 미국에서 밀과 보리 등의 원조를 받으면서 ‘혼분식장려운동’이 전개됐다. 다만 이승만 정부에서는 혼분식장려운동도 실패를 했다.박정희 정권 들어서면서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73년 서울시가 ‘시범대중식당’을 선정하게 됐다. 그것은 지름 11.5cm, 높이 7.5cm 스테인리스 밥그릇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다. 해당 의무는 3년 후 서울시내 모든 음식점에 확대됐고, 그 이후 밥그릇 규격은 더욱 작아졌다. 만약 위반을 하게 되면 1번 위반하면 1개월간 영업정지, 2번위반하면 아예 식당 문을 닫도록 하는 강한 처벌까지 마련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전국으로 확대된다. 이때 밥그릇의 양이 200g 정도였다.햇반이 210g인 이유
햇반의 표준 용량이 210g이다. 그것은 1996년 햇반 출시 당시 소비자 조사 결과 남녀 평균 밥 한 그릇이 210g이었다. 그것은 당시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보급이 되면서 해당 밥그릇이 표준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외에도 과학적인 원리도 있다. 210g 정도는 300kcal 정도의 에너지를 담았다. 1일 3끼를 먹는다고 했을 때 권장 칼로리는 남자는 1끼에 700kcal, 여성은 500kcal 정도이다. 즉, 햇반 1개를 반찬과 먹으면 권장 칼로리를 비슷하게 섭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