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3월 21일 조천만세운동 발발
2025-03-21 어기선 기자
휘문고보 학생 귀향
그해 3월 16일 서울 휘문고보 김장환 학생은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을 했다.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에게 3.1운동 상황을 이야기했고, 김시범은 제주에서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에 김시범은 제쥬 유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날 아침 조천리 미밋동산에 김시범·김시은·고재륜·김형범·김연배·황진식·김용찬·백응선·김장환·박두규·이문천·김희수·김경희·김필원 등의 14인 동지와 김순탁·김시희·김백능·부병각·김종호·한석영·한석화·심동인·한백흥 등 모두 23인의 거사동지, 그리고 조천리 주민과 인근 함덕·신촌·신흥 등지의 서당 생도 등 약 150여명이 모였다. 김필원은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을 했고, 주민 500여명이 동참했다. 그리고 신촌리에서 경찰과 충돌을 했으며 김시범과 김시은 등 13인이 체포됐다.4차까지
그 다음날인 22일 조천리 장터에서 백은선·박두규 등의 지도로 약 200여명이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시위가 일어났으며 역시 신촌리까지 행진을 했으나 박두규, 김필원 등이 연행되면서 해산하게 됐다. 23일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3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함덕리에 이르자 80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문천과 백응선 등 8명이 일제 경찰에 연행됐다. 24일은 조천 오일장 날이었다. 이에 김연배를 중심으로 약 1천5백여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날은 부녀자들도 상당수 합세하면서 일어났지만 김연배 등 4인이 체포되면서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