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작가의 어설픈 제주이야기 10] 삶을 이끌어 온 아름다운 공동체 제주 해녀

- 육지로 올라간 손자를 위해 매달 소포를 보내는 해녀 할머니 - 외할머니의 그리움이 돋아나는 ‘해녀의 부엌’ - 제주 해녀, 2016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24-04-02     김민수 여행작가
평생
외할머니는 해녀로 살았다. 4.3 사건으로 할아버지를 잃고 홀로 되었을 때 나이가 29세, 억척스레 바닷일을 하며 홀로 3남매를 키웠다. 그녀는 상군 중의 상군으로 제주 동쪽 지역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해녀로 살았던 외할머니

할머니의 주 종목은 미역이었다. 그녀의 미역은 품질이 좋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직접 물질도 했지만, 장사수완도 뛰어났다. 해녀들에게 미리 돈을 나눠주고 채취된 미역을 수집해 육지에 내다 팔기도 했다.  
채취한
박으로
소라을
그런 할머니를 둔 덕에 어린 시절에는 1일 1 전복을 먹을 수 있었다. 첫 손자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각별했다. 육지로 올라간 손자를 위해 매달 소포를 보냈다. 혹시 새거나 상하지 않을까, 몇 겹씩 싸고 동여맨 그 속에는 소라, 전복, 성게, 문어, 미역, 말린 옥돔 등이 들어있었다. 한동안은 직접 잡아 보냈고 나이가 들어 물질을 그만둔 이후에는 해녀들에게 사서 보냈다.  고백하건대 할머니의 소포가 그리워진 것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후다. 당연한 일인 줄 알았던 소포 하나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 있었는지도 말이다. 군부를 제주에서는 군벗이라 부른다. 껍질이 단단한 딱지조개를 일컫는 말이다. 소포에는 군벗젓이 단골처럼 들어가 있었다. 전복이나 소라젓만큼의 화려한 맛이 아니었기에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장 늦게 먹었다.   그런 군벗젓에 많은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갯바위에 단단하게 붙어있는 군벗을 떼어내는 일도 힘들지만, 정작 고생은 그다음부터다. 딱딱하고 검은 껍질을 돌에 비벼 떼어내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소금물로 씻은 다음 항아리에 담고 다시 소금을 뿌려 숙성시킨다. 그리고 고춧가루, 마늘 등으로 양념해 먹는다. 할머니는 이런 양념 대신 게옷(전복내장)을 넣어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을 유리병(당시는 플라스틱 병이 귀했으니)에 담아 깨지지 않록 꼭꼭 싸 보냈다. 외할머니는 90세까지 소포를 보냈고 100세를 닷새 앞둔 2017년 12월 25일 하늘나라로 가셨다. 군벗젓은 당신을 떠 올릴 때 가장 생각나는 음식이다. 지금은 제주 어느 식당에 가도 군벗젓을 볼 수가 없다. ‘해녀박물관’과 ‘해녀의 부엌’은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돋아나게 했던 곳이다. 미처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삶을 그곳에서 보았다.  

그녀들의 제주 ‘해녀박물관’

해녀박물관은 2006년 개관했다. 제주 해녀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굴, 보존하여 그 문화를 이어가기 위한 취지에서다. 본관 1층 로비에서 전시실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제주 전통 초가집이 관람객들은 맞이한다. 실제 해녀(이남숙 1921~2008)가 거주했던 집을 그대로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제주
온가족이
쉼터
제주 초가의 재료는 자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돌, 흙, 나무, 띠와 같은 것들이다, 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붕은 낮게 했으며 굴묵 난방의 효율성을 위해 방을 자그마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식사문화도 엿볼 수 있다. 제주에서는 몇십 년 전만 해도 밥을 낭푼이라 부르는 큰 그릇에 담아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먹었다. 식기나 식량 등 모든 것이 귀했지만, 무엇보다 물때에 맞춰 바다로 나가야 하는 아녀자의 바쁜 삶이 투영된 전통이다. 보박잎이나, 콩잎으로 쌈 싸 먹기, 모닥치기(한 번에 섞어 먹는 음식), 두루치기 등도 간결한 식사를 위한 방편이었다. 1전시실이 1960~1970년대의 세간을 통해 해녀들의 살림살이와 어촌마을의 형태, 그리고 세시풍속에 관한 공간이라면 한 층 위에 있는 2전시실은 불턱과, 물질 장비 등을 통해 본격적인 해녀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해녀들은 하루 대여섯 시간씩 물질한다. 한 번 바닷속에 들어가면 1, 2분씩 숨을 참고 해산물을 채취한 후 물 밖으로 나왔다. 숨비소리는 턱까지 차올랐던 숨을 물 밖으로 나와 내뿜는 소리다. 그녀들에게 붙턱이라는 공간은 옷을 갈아입고 물질을 준비하며 또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딸에게로 이어지는 수련의 장이며 의사소통과 결정의 장으로도 역할을 했다. 지금은 단단한 건물로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제주 동쪽 해안에는 곳곳에 옛 불턱의 흔적이 여전히 존재한다. 
자연산
제철
해녀에게
제주 해녀는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해녀는 물질의 경험과 숙련도에 따라 상궁,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하지만 연장자를 존중했고 연소자들에겐 애기바다를 기력이 좋지 못한 할머니들을 위해 할망바다를 배려했다.  해녀들은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물소중기’(하의) ‘물적삼’(상의)이라 부르는 무명으로 된 해녀복을 착용했다. 고무 옷이 보급된 70년대 들어서야 장시간 작업이 가능하고 능률도 크게 올랐다. 2층 전시실에는 해녀복 외에 수경, 테왁 망사리, 빗창, 까꾸리 등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그 시절의 도구들 또한 유리관 안에 가지런히 전시되고 있다. 해녀들은 19세기 말부터 한반도 전역은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으로도 진출했다. 이를 출가 해녀라 부르는데 이들은 당당히 제주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그리고 해녀들은 지역에도 헌신적이었다. 기금을 조성하여 마을 일을 도왔으며 학교건물을 신축,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3전시실은 그야말로 현직 해녀들의 공간이다. 해녀들이 전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은 물론 어렵게 배운 한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낸 정겨운 솜씨들도 만나 볼 수 있다. 제주에는 현재 3,400여 명 정도의 해녀가 활동 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연로해서 그 숫자는 해가 거듭될수록 줄어드는 실정이다. 

바다가 차려낸 진심 밥상, ‘해녀의 부엌’

해녀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녀들이 바다에서 직접 채취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 바로 ‘해녀의 부엌’이다. 해녀의 부엌은 종달리를 본점으로 북촌에 2호점이 있다. 
해녀의
해녀의
프라이빗
본점은 현직 해녀와 그녀를 빙의한 연기자가 출연 연극형식으로 공연한 후 뷔페식으로 요리를 제공한다. 첫 번째 코너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운명적으로 해녀의 삶을 살아왔던 해녀, 공부를 포기하고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해녀, 아이를 밴 채 원정 물질을 떠나 사고를 당했던 해녀 등 다른 듯 또 같은 주제를 가지고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된다. 관객들은 제주 해녀의 억척스러운 삶과 내면의 고단함을 들여다보며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두 번째 코너는 뿔소라, 성게, 군소, 우뭇가사리, 톳 등 제주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들을 소개 받는 순서다. 해녀가 직접 출연해 채취과정, 특성, 조리방법까지 들려준다.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상승하며 입안에 군침이 서서히 돌기 시작한다. 세 번째 코너는 식사 시간이다. 모든 요리는 해녀의 손길을 거쳐 제공된다. 제주의 집은 마당 한켠에 우영팟이라고 하는 텃밭을 품고 있다. 우영팟에서 재배한 싱싱한 농산물도 재료로 쓰인다. 톳과 흑임자로 만든 죽은 바다와 우영팟의 앙상블이다. 갈치조림, 뿔소라꼬지, 군소무침, 우뭇가사리 양갱도 그 맛이 진심이다.  북촌점은 12명의 예술가가 만들어 내는 미디어아트를 기반으로 한다. 프라이빗 공간에서 14명만을 위한 코스요리가 제공된다는 점에서 본점과 차별된다. 미디어아트 영상은 70년대 북촌리 해녀의 모습을 시작으로 어느 순간 깊은 바닷속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4. 3의 아픔까지, 마치 제주의 근대역사를 보는 듯하다.   도슨트의 진행으로 이어지는 식사도, 메뉴 한 가지마다 이야기를 담아낸다. 전통 발효음료 흑보리 쉰다리를 웰컴드링크로 상웨덕, 빙떡, 옥돔구이 등 제주 토속음식이 차례로 등장하는 가하면 성게알, 뿔소라, 돌미역 등의 해산물도 빠지지 않는다. 끝으로는 흑돼지 돔베고기에 꽃멜소스가 밥과 함께 제공되는데 시종일관 눈과 입이 푸짐해진다. 해녀는 아무런 기계 장치 없이 자기 호흡만을 가지고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말한다. 2016년 제주 해녀는 독특한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