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 봉기
2025-04-19 어기선 기자
나치 점령군의 유대인 말살 정책
나치 점령군은 1942년부터 본격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을 시작하면서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해 처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것을 유대인들이 점차 알기 시작하면서 대응책 마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소수 유대인들은 전투조직, 유대인 군사협회를 조직하면서 나치 점령군에 대한 목숨을 건 저항을 시도하게 된다. 물론 외부와의 연락이 어려웠기 때문에 물자 보급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저항을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점차 비축했다. 수백 자루의 권총, 약간의 소총, 카빈총, 극소량의 기관총, 폭약, 화염병, 수류탄 등을 준비했다. 무기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지원병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해야 했다. 이에 1천여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19일 봉기를 시작했다. 이날을 선택한 것은 유대인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첫 번째 날이기 때문이다.나치점령군의 소탕 작전
나치 점령군 2천여명이 게토를 포위했고, 유대인은 저항을 했다. 나치점령군은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패주를 했다. 이날의 전투에 대해 유대인들은 자축을 하면서 기뻐했다. 하지만 나치점령군은 결국 다시 게토를 침입했다. 유대인들은 벙커를 중심으로 저항했고, 나치점령군은 수류탄과 최루탄을 벙커에 던져 넣으면서 유대인들을 소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처절하게 저항을 했다. 결국 5월 8일 나치잠령군은 유대인 전투 조직의 벙커를 포위했고, 유대인들은 나치점령군에 붙잡힐 바에는 인간 다운 죽음을 선택했다. 이날 살아남은 100여명의 사람들은 1944년 국내군의 바르샤바 봉기에 참여하면서 그 정신을 이어갔다. 만약 유대인의 저항이 없었다면 1944년 바르샤바 봉기는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유대인은 무기력하게 죽을 바에는 저항하다가 죽겠다는 선택을 했고, 그것이 나치점령군을 몰아내는 동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