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한국군 베트남 파병

2025-04-19     어기선 기자
영화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이면서 최대 해외 파병이다. 우리 경제의 경이로운 성장을 할 수 있게 한 사건이다.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득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다만 참전용사나 파월노동자의 희생 등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 위에서 경제가 성장하고 오늘날과 같은 선진국 진입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주한미군 빼려는 미국

베트남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전투 병력이 모자르게 되자 주한미군 일부를 베트남에 파병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부는 미군이 빠져 나가는 것을 우려해서 결국 파병을 하겠다고 먼저 제안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파병을 결정하게 됐다. 미국으로서는 단독으로 월남전을 치르게 되면 국제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 형태를 취해야 했고, 박정희 정부의 제안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또한 막대한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월남전에 파병되는 한국군을 미군과 비슷한 전투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돈을 대주고 한국에서 쓸 전쟁물자를 한국에서 생산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한국 산업 역시 활기를 띄게 만들었다.

전쟁특수 일어나

우리 기업으로서는 베트남에 진출하면서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됐다. 토목, 건설업은 물론 유통과 물류 등의 기업이 상당한 성장을 하게 됐다. 가장 대표적인 기업이 현대건설이었다. 현대건설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총 195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둔다. 그것은 베트남을 비롯해 타이, 일본, 미국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건설 기술도 익히면서 훗날 경부고속도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게 됐다. 베트남에 진출해서 큰 수익을 거둔 기업 중 하나가 한진그룹이다. 한진상사는 주월 한국군의 물자 수송을 도맡아 하면서 회사의 규모를 비약적으로 키우게 됐다. 그리고 1969년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서 대한항공으로 바꾸면서 물류 전문 그룹의 기반을 쌓았다. 다만 파월노동자의 임금을 갈취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분노한 노동자들이 1971년 9월 ‘칼(KAL) 빌당 방화사건’을 터뜨리기도 했다. 또한 국내에서는 신발, 가발, 의류 등 경공업 중심의 수출이 이뤄졌다. 그것은 베트남전을 치르면서 각종 군수산업 상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외국기업에서 종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국내로 월급을 송금하면서 전쟁특수를 누리게 했다. 월남 파견 노동자들이 송금한 돈으로 가족들의 소비가 촉진되면서 그에 따라 국내 수요가 증가하고, 이에 국내 기업들의 상품 생산량이 늘어나게 됐다.

군인과 노동자의 희생

이처럼 전쟁 특수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군인과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인과 노동자는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외국계 회사 노동자들은 그나마 대우가 좋았지만 한국 기업은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장시간 노동에 비해 터무니 낮은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묵묵이 일을 하면서 기업은 성장하고, 국내 경기도 살아날 수 있었다. 군인들의 희생도 상당했다. 파병 군인들의 월급과 전투수당은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리고 전사군인에 대한 대우도 적절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엽제 피해 등 그 후유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