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30일 사이공 함락, 남베트남 몰락

2025-04-30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5년 4월 30일은 월맹군이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을 함락하면서 남베트남이 몰락한 날이다. 남베트남은 1955년 건국된 이후 1975년까지 북위 17도 베트남 군사분계선 이남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북베트남과 대치했던 나라다.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종결되면서 프랑스와 베트남의 휴전으로 1954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분단됐다. 그리고 베트남전을 치렀지만 미국은 결국 남베트남에서 철수 결정을 하면서 베트남전이 종전됐고,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오늘날 호치민시가 됐다.

반공 기치로 내세웠지만

남베트남은 반공 독립운동 세력 중 응오딘지엠이 세운 나라이다. 문제는 집권한 응오딘지엠이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면서 같은 반공 진영에 있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남베트남의 정통성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특히 응오딘지엠은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등 종교까지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권 수뇌부들이 일부 극소수 기득권 세력만 차지하게 됐다. 숙청된 세력 대다수가 반공 독립운동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숙청됐다는 것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이 사라지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응오딘지엠 이후 집권자들 상당수가 프랑스 식민지 시대 부역했던 인물들이었다.

환멸 느끼는 민심

응오딘지엠 이후 쿠데타 연속으로 군정 그리고 응우옌반티에우가 집권했지만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통치 능력 등으로 남베트남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만 그들은 북베트남이 통일을 하는 것은 반대를 했다. 그것은 반공주의가 상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사실상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됐지만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다른 민족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증오가 상당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 했을 때에도 식민지배를 베트남 전지역에 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베트남은 식민지배 시절에도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여기에 1940년대 일본군까지 들어오면서 베트남은 더욱 복잡해졌다. 여기에 군벌 역시 막장을 달리면서 그에 따라 민심은 더욱 돌아서게 됐다.

명분 없는 싸움돼

베트남전이 시작됐을 때 북베트남은 직접적 공세가 아닌 베트콩을 지원하면서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데 주력을 했다. 베트콩을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포장했다. 그런 가운데 응오딘지엠의 각종 비리 등이 서방에 알려지면서 미군의 개입에 대한 명분이 점차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68운동으로 대변되는 반전 운동이 미국 전역에 일어나면서 베트남 전쟁은 점차 명분이 약해졌다. 만약 남베트남이 정통성을 갖고 있고, 부정부패에 대한 확실한 척결을 했다면 명분 있는 싸움이 되면서 그에 따라 미국이 좀더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했을 것이다. 흔히 보수세력이 남베트남은 간첩의 공작과 공산주의자의 국론 분열 조장으로 망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으로 남베트남이 멸망했다는 것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간첩과 공산주의자의 국론 분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결국 남베트남의 정통성이 약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UN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국가였으며, 군부독재 시절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부정부패를 척결하면서 민주주의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남베트남과는 상황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