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영수회담
2024-04-30 어기선 기자
과거 영수회담은
영수회담은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남을 갖는 것을 말하며,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영수회담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이 당초 무소속이었고, 나중에 자유당을 만들기는 했지만 국회와 거리를 뒀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삼권분립을 배웠기 때문이다. 또한 국부(國父)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야당 대표가 대통령을 만나는 것에 대해 국민이 크게 거부감을 가졌다. 헌정사상 최초의 영수회담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5년이다. 당시 박순천 민중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전쟁 파병 동의안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가장 유명했던 영수회담은 1975년에 있었다. 당시 영수회담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으면서 밀약설이 나돌았고, 김영삼 당시 총재는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된다. 본격적인 영수회담은 1987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회담이었다. 이 회담 이후 6.29선언이 발표됐다. 당시 4.13 호헌조치 철회, 김대중 사면복권, 6·10 민주항쟁 관련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했지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즉답을 피했다. 1988년 이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등 야당 총재들과 만나는 영수회담을 자주 가졌다. 급기야 1989년에는 청와대에서 4당 대표 모두 모여 술을 곁들인 만찬회동도 가졌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 영수회담은 2회였지만 야당 대표들과는 다자회담 형식으로 자주 가졌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영수회담은 여러차례 진행됐고, 약학 분리, 남북정상회담, 9.11테러로 인한 민생조치 등의 합의를 이뤄냈다.노무현 정부 들어서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5년 영수회담은 대연정에 관한 회담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대연정 제안을 거부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임하던 것을 끝내면서 당정분리가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영수회담이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영수회담이 빈손으로 끝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영수회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늘어났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자신은 행정부 수장이지 여당 영수가 아니라면서 민주당과 한나라당 대표끼리 만나서 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에는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가졌는데 주요 의제는 한미FTA 비준 처리와 한미 쇠고기협상이었다. 하지만 한미 쇠고기 협상 관련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면서 합의가 결렬됐다. 박근혜 정부 당시에는 영수회담은 없었지만 다자회담은 많이 가졌다. 2016년 11월 당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청와대에 영수회담을 제안했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수락하면서 영수회담이 열릴 뻔 했지만 탄핵 여론이 높아지면서 결국 영수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자신이 당 대표 하는 한 영수회담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영수회담이 열리지 않는 듯 했다. 다만 2018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2주 전에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홍준표 대표의 단독 영수회담이 열렸다.영수회담이 점차 기능 상실한 이유는
영수회담이라는 것이 결국 대통령이 막강한 권한을 가졌을 당시에 만들어진 회담이다. 그것은 대통령이 여당 총재까지 겸임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야당 역시 ‘총재’라고 해서 강력한 카리스마로 당권을 쥐고 있었을 당시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당 장악력이 높은 사람들끼리 만나서 통큰 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바로 영수회담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더 이상 여당 총재를 할 수 없게 됐고, 야당 총재 역시 ‘당 대표’로 격하되면서 당에 대한 장악력이 예전만 못하게 되면서 영수회담의 필요성이 점차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정당이 ‘당 대표’ ‘원내대표’로 이원화되면서 당 대표의 역할이 상당히 줄어들면서 영수회담이 ‘상정적인 만남’이 됐을 뿐 실질적인 만남이 아니게 됐다. 그러면서 오늘날 영수회담은 ‘정치적 소통’을 하는 자리 정도의 수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