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산후조리원
2024-05-08 어기선 기자
세계대전 겪으면서 여성의 사회진출
분만 시 산파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전적인 의미의 산후조리원은 고전시대부터 있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조산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한 시설이 있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분만센터라는 이름으로 운영해왔다. 조산원 혹은 분만센터라는 이름으로 운영을 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더 이상 출산과 산후조리를 여성 개인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출산과 산후조리를 돕는 형태의 시설이 존재하게 됐다. 다만 초점은 ‘여성’이 아니라 ‘아이’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조산원과 분만센터이다.산후조리원 원조는 독일
여성의 입장에서 산후조리를 다루는 시설이 등장한 것은 1987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게부르트하우스(Geburtshaus)이다. 게부르트하우스(Geburtshaus)는 기존의 시설과 달리 여성의 신체적, 심리적 건강 등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데 집중했다. 1980년대 여성운동의 지원을 받으면서 확장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산후조리원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996년 10월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에서 최초로 문을 열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기존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하지만 제왕절개 수술이 급격히 흔해지면서 확산됐다. 다만 그때까지 산모가 산후조리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찬반이 오갔다. 그러나 2009년 모자보건법이 개정되면서 산후조리원의 법적인 규격이 확정되자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한국에서 산후조리원이 확산된 이유
한국에서 산후조리원이 확산된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산후에 필요한 노동이 많기 때문에 산모 혼자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아버지의 출산휴가를 내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사회이고, 빠르게 산업화가 되면서 시부모 혹은 친정부모 역시 출산과 산후조리를 담당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갖는 사회가 됐다. 그러면서 누군가 출산과 산후조리를 도와줘야 하게 됐고, 이에 비싼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산후조리원에 가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다른 나라도 아버지의 출산휴가가 보장되지 않고 있고, 시부모나 친정부모 모두 출산과 산후조리 담당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가정으로 산후관리사가 온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산후조리원이 발달한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