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김희연 기자] 국내 대표 제과기업 크라운해태그룹의 역사는 2005년 과자 선물 세트의 원조 격인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두라푸드가 최대 주주인 크라운해태홀딩스가 모기업이며 그 아래 자회사로 크라운제과와 해태제과가 있다.
두라푸드는 크라운해태홀딩스의 지분 38.08%를 보유하고 있다.
크라운해태그룹은 최초 과자인 연양갱부터 최초 샌드비스킷인 산도, 최초 껌인 슈퍼민트, 최초 콘아이스크림인 부라보콘, 최초 시리얼스낵인 죠리퐁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과자의 오늘'을 만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밤양갱’이 최근 음원차트 1위에 오르며 관련 제품인 해태제과와 크라운제과의 양갱 매출도 뛰었다. ‘밤양갱’은 장기하가 작사·작곡하고 비비가 부른 곡이다. 해태제과는 연양갱을 크라운제과는 밤양갱을 만들고 있다. 시장 점유율은 8대 2 정도다.
크라운제과
크라운제과의 창업 이야기를 그린 1999년 작 ‘국희’라는 드라마는 방영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크라운제과의 샌드 과자가 드라마 이름을 따와 ‘국희 땅콩샌드’로 리뉴얼 될 정도였다. 드라마에서는 김혜수가 연기를 했지만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은 드라마가 만들어질 시기에 눈을 감은 창업주인 백포(白浦) 윤태현 회장이다.
일제강점기에 윤회장은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웠는데, 손재주도 있고 성실해서 지금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있는 당시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에서 양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생 끝에 위장병이 심해져 일을 그만두는 데, 고향에 내려가 만둣집에서 일을 한 게 사업 시작의 계기가 된다.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제과제빵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5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기존에 있던 일본인들도 떠나자 윤태현 회장은 형제들과 제과점을 빌려 가게를 시작했다.
크라운제과의 전신은 영일당이다. 미군정 시기 1947년 3월, 미군이 들어오면서 과자랑 빵을 먹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자, 서울역 뒤에 있던 친구 집에 부엌 한 켠을 빌려 영일당제과소(永一堂课製菓所)를 설립했다.
당시 빵이 귀할 때라 내놓으면 매우 잘 팔리던 시기였는데 빵 표면에 지금도 보습제로 많이 쓰이는 윤기 나는 식용 글리세린을 발라 장사가 매우 잘됐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글리세린을 구하기 어려워져 핵심 경쟁력을 잃은 영일당은 위기에 빠진다. 제과제빵이 삶의 전부였던 윤 회장은 피난을 가서도 천막을 치고 미군들이 있는 비행장 앞에 가서 아내와 함께 과자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들은 PX를 통해 윤 회장에게 미국에서 나온 과자를 보여줬고 여기에서 많은 과자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또한 과잣값을 현금이 아닌 미군 부대에서 나온 밀가루랑 버터로 줬기에 미군들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이들 재료로 새로운 걸 만들어 냈다.
크라운제과 상호 탄생 스토리
특히 오늘날 잘 알려진 웨하스는 모양을 만들어 내는 기술뿐만 아니라 보관과 운송도 어려워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부유한 집 애들만 먹었다는 얘기가 있다. 내성적이고 묵묵한 성격이었던 윤 회장은 장인 정신을 발휘해 과자를 굽고 직접 기계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웨하스가 대히트를 쳤다. 이후 웨하스를 따라하는 곳들이 많아지자 윤 회장은 과자에 새로운 상표를 새기고 싶어 했다. 이에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등장한 왕관을 보고 1956년에 영일당에서 아예 상호를 크라운제과로 바꾼다.
미군들한테 영감을 받은 과자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크라운산도가 있다. 당시 미군이 먹는 샌드비스킷을 보고 금속 틀을 직접 깎아 기계를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비싼 미제 샌드비스킷을 크라운산도가 한 번에 빠르게 대체했고 산도는 크라운제과에 날개를 달아줬다. 워낙 인기 있는 탓에 도매상들이 줄을 지어 사 갈 정도였다고 한다.
크라운제과의 더 큰 성장을 원했던 윤 회장은 현재 크라운제과의 장남인 윤영달 회장을 미국으로 보내 유학시킨 후, 다시 불러들여 60년대 후반부터 자기 일을 돕게 한다. 미국에서 선진문물을 배운 아들이 도매상 말고 직판을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초반에는 사업이 계속 어긋나는 듯했다. 초창기에 야심작인 죠리퐁이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매상을 안 거치고 자전거, 리어카를 직접 끌면서 영업망이 갖춰지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진도 높았으며 직접 뚫은 소매상 중에 용산 한강맨션에 있는 슈퍼 미군 가족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이 죠리퐁을 보고 시리얼 대용으로 먹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수입하는 시리얼에 비하면 가격이 4분의 1에서 5분의 1였고, 미국 사람한테 인기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죠리퐁은 전국에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위장병 때문에 고생한 윤태영 회장은 더욱 까다로워진 입맛 덕에 1960년대는 산도, 70년대에는 죠리퐁이라는 히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70년대 후반부터 먹거리가 늘어나면서 산도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80년대에는 산도를 동그랗고 잘 안 부서지는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리뉴얼했다. 산도가 부활하자 다른 신제품들도 훨훨 날았다. 대표적으로 빅파이, 비단박하, 커피나, 프랑소아, ᄎᆞᆷ크래커, 그레이스, 쿠크다스, 콘칩이 있다.
또한 80년대 후반에는 초콜릿을 본격적으로 생산해 상대적으로 고가였던 블랙로즈 초콜릿을 내놓는다. 애들이 아니라 어른도 먹는 컨셉인 블랙로즈에 힘입어 미니쉘과 카라멜콘과 땅콩과 같은 고급형 과자도 출시했다. 크라운에는 다른 업체들과 다른 고급형 과자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1991년 9개밖에 안 들어있는 쵸코하임이 1700원에 달했다.
당시의 파리바게뜨, 크라운베이커리
크라운제과는 1965년부터 광화문에서 제과점으로 시작해 식빵이랑 케이크를 납품하기도 했다. 1986년 생크림 케이크 대량 생산에 성공한 크라운제과의 생과사업부는 1988년에 크라운베이커리로 독립한다.
크라운베이커리 이전에는 이렇다 할 만한 프랜차이즈 제빵 브랜드가 없었는데 어느 매장을 방문해도 모양은 물론 비슷한 맛을 느낄 수 있었던 크라운베이커리는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에 충분했다.
크라운베이커리는 가파르게 성장해 업계 1위를 단순에 차지했으며 업계 최초로 TV 광고를 방영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파리바게뜨, 뚜레주르 못지않은 국내 대표 베이커리였다. 92년에는 제과점 케이크 단일 품목 100만 개를 판매하기도 했다.
IMF, 다시 본질에 집중
크라운제과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잘 나가던 중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진다. 과자 부문은 여전히 괜찮았지만 아이스크림 전문점, 유통업, 음료, 의약품, 건설업 등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한 탓에 1998년 IMF 위기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돼 어음 5억 6천만원을 못 갚아 부도가 난다.
파산을 막고자 크라운제과는 빚 갚는 걸 미뤄달라는 화의신청을 하며 공장을 매각했다. 생산라인도 통폐합하며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행해야 했다. 제과 사업에서도 경쟁업체의 등장으로 크라운베이커리 역시 힘을 잃어갔다. 영광스러운 창립 50주년이, 크라운제과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가 됐다. 또한 얼마 뒤 드라마가 방영될 때 창업자는 세상을 떠난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크리운제과가 집중한 건 다시 과자였다. 공장을 팔고 다른 비용 줄여 아낀 돈으로 새로운 과자 개발에 몰두해 탄생한 버터와플은 당시 과자의 귀족이라는 이름을 달며 히트를 쳤다.
하지만 버터와플처럼 계속 신제품을 만들기에는 자금이 부족해 크로스마케팅 전략으로 외국업체랑 제휴를 한다. 외국에서 생산한 과자에 크라운 상표를 달아서 팔고, 반대로 크라운제과의 과자를 외국 상표를 달아 파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히트작을 많이 냈는데 대표적으로 참쌀선과라는 쌀과자가 있다.
과자에만 다시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금세 회복한 크라운제과는 화의를 조기 종결해 2005년에는 매출이 두 배 넘게 컸던 해태제과를 인수한다. 본업인 과자에 집중한 확장이 크라운제과에 제2의 도약기를 가져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해태제과
해태제과의 창업주인 방병규는 1925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복 전까지 일본인이 운영하던 나가오카 제과의 경리 직원이었으며 광복 후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과 함께 해태제과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은 충직하고 옳고 그름을 능히 구별할 줄 아는 상상의 동물 해태에서 따왔다.
해방과 함께 탄생한 해태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해방 직후라 모든 것이 부족했고 사회는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해태임직원들은 굶주린 직원들의 배를 채우겠다며 가마솥에 재료를 넣어 졸이는 전통 방식을 사용해 만든 연양갱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출시 직후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임직원의 절반 이상을 잃고 판매 조직이 대부분 와해했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피난 시에 가마솥과 보일러 등을 들고 다니며 생산을 멈추지 않았으며 출시 이후 단 한 번도 판매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태의 전성기
70-80년대는 해태제과의 전성기를 맞았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는 제품들이 이 당시 많이 출시됐다.
대표적으로 1970년 국민 아이스크림으로 불리는 부라보콘을 출시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 공장 출입문을 봉쇄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12시에 만나요’라는 부라보콘 광고는 지금까지도 소비자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북한에 부라보콘을 건네자, 북측은 이를 맛보고 미제가 아니냐고 물었다고 할 정도였다.
개발 당시 의도하지 않은 끝부분 초콜릿은 사실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 과자가 눅눅해지지 않기 위한 장치였다. 생산 초기에는 초콜릿 입자가 고르지 않았고 코팅에 사용한 초콜릿이 아래쪽에 고여 기술이 부족해 만들어진 형태였지만, 오히려 소비자는 더욱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콘형 아이스크림은 초콜릿을 넣어 출시했다.
1975년 출시된 맛동산은 현재까지도 많이 사랑받고 있으며 향기나는 여왕이라는 컨셉인 아카시아 껌은 출시와 동시에 CM송과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더불어 에이스, 바밤바, 계란과자 등을 출시하며 큰 성장을 보였다.
1980년대에는 해태제과가 가정간편식사업에 진출하면서 국내 최초 냉동만두인 '고향만두'가 탄생했다.
1981년에는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홈런볼을 선보였으며 야구 열풍에 힘입어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와 더불어 80년대에는 후렌치파이, 버터링 등 장수제품들을 출시하기도 했다.
해태의 몰락
해태의 몰락은 2세 경영에서부터 시작된다. 1970년대 후반 해태의 창업주인 박 회장이 별세하자 4명이 창업한 해태였기에 갈등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태의 새로운 수장 박건배 회장은 식료품의 비중을 줄이고 전자와 건설을 주력으로 키우겠다고 나섰다. 당시 롯데 등이 뛰어들며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제과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켈과 나우정밀을 연달아 인수해 전자 그룹으로 도약을 꿈꾸며 기존에 인수했던 공업사를 해태중공업으로 바꾸면서 중공업까지 진출했다.
박 회장의 경영은 초기에는 성공하는 듯 보였다. 제과와 음료 사업에서 호조를 보였고 전자 또한 흑자 전환하며 대부분의 계열사가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 사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와 중공업에서의 지속적인 적자로 자금난을 겪게 되고 외환 위기로 직격탄을 맞으면서 결국 무너지고 만다.
당시 박 회장은 “부라보콘만 먹고 초코파이 대신 오예스를 사 먹곤 했는데”라면서 당시 비통한 마음을 밝히기도 했다. 해태그룹의 몰락은 탈 식품을 선언하고, 전자, 건설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한 박건배 회장의 무리수에서 비롯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옳고 그름을 선택한다는 해태 회장이 잘못된 선택을 한 순간이었다.
해태제과의 재도약
결국 2005년 해태제과는 크라운제과에 팔리면서 크라운해태제과라는 한 가족이 되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2014년에 해태제과는 ‘허니버터칩’을 선보이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해태제과는 선택과 집중을 위해 빙과류 사업을 분리해 해태 아이스크림을 신설했지만 빙그레에 1400억 원에 매각한다. 유명한 제품으로는 부라보콘, 바밤바, 누가바 등이 있다.
한편, 해태제과는 시장조사를 통해 끊임없이 신제품을 만들어 내는 중이다. 해태제과는 허니버터칩이 한국과 일본에서 새로운 맛으로 동시에 출시된다고 13일 밝혔다. 이번 달부터 허니버터칩 애플버터맛 스페셜 에디션을 한일 양국에서 50만 봉지씩 만날 수 있다. 동일한 신제품을 한국과 일본 시장에 동시 출시하는 것은 이례적인 마케팅 전략이다.
아이들이 줄어가고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과자 사업이 위기라는 얘기가 한참 전부터 나온 상황 속, 제과 업계가 앞으로도 과자로 행복을 주는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