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갤리선

2025-05-16     어기선 기자
영화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갤리선은 고대와 중세 지중해에서 활동했던 범선의 한 종류이다. 통상적으로 돛을 이용해 이동을 하지만 전투에서는 노를 이용한다. 다만 노젓는 행위는 고도의 전문적 기술과 노동력을 요하기 때문에 무조건 ‘노예’에게만 맡길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은 자유민이었고, 그들은 노 젓는 것을 통해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 참정권 등을 확보했다.

갤리선 노젓는 사람은 자유민

갤리선의 노잡이가 자유민인 이유는 노예로는 절대 노를 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예가 노를 잡는 경우는 그야말로 비상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노예가 노를 젓는다고 하면 ‘노예 해방’을 약속해야 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어야 했다. 그 이유는 노를 젓는 것이 엄청난 노동력을 요하기도 했지만 고도의 기술을 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앞뒤로 노를 저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명령에 따라 자유자재로 노를 저어야 했기 때문에 노예로는 노를 저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유민이 노를 저었다. 노를 젓는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과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국가 중에서 노잡이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이뤄 내거나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사례도 있다. 그만큼 노를 젓는다는 것은 엄청난 지위와 특권을 부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에 일부 빈민층 자유민은 노를 젓는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상승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예컨대 중장보병의 경우에는 부잣집 자유민이 배치가 되지만 가난한 집 자유민은 노를 젓는 것으로 자신의 재산과 특권을 부여받았다. 실제로 고대 아테네는 노 젓는 것을 통해 자유민이 됐고, 그것이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싹트게 만들었다. 갤리선을 사용하게 된 것은 지중해는 바다는 잔잔하지만 바람의 방향이 불규칙했다. 따라서 돛만으로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투는 주로 ‘충파’(배로 배를 깨부수는 전투)가 주력이기 때문에 노를 저어야 했다. 그것이 고대와 중세 해상전투의 주요 전술이었다.

지중해 제해권 빼앗긴 유럽

하지만 1500년 경 유럽은 지중해 제해권을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겼다. 오스만 제국이 동방의 물산을 전부 장악하고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면서 서구 유럽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대서양으로 나아가야 했다. 대서양은 바람의 방향은 일정하지만 파도는 불규칙했다. 그런 대서양에서 갤리선은 부적절한 선박이 됐다. 또한 노잡이와 노가 들어갈 공간까지 화물칸으로 바꾸면 적재량이 많아지고 경제성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장기간 항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식수 확보가 필요했다. 만약 노잡이를 통해 장기강 항해를 하려고 하면 수많은 식수통을 배에 실어야 했다. 그것은 그만큼 적재량이 많아져야 했고, 그에 따라 배가 무거워지고 오히려 멀리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런 이유로 갤리선 대신 범선이 출현했다. 무엇보다 범선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었던 반면 갤리선은 대포를 장착하기는 부적절한 선박이었다. 만약 판옥선이었다면 노잡이를 아랫공간에 배치하고 윗공간에 대포를 장착한다고 해도 포를 쏘고 나면 반동에도 흔들거림이 덜했다. 하지만 갤리선은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대포를 쏘면 그 반동에 의해 배가 흔들려서 전복되기 쉽다. 무엇보다 갤리선이 몰락하게 된 것은 경제성이다. 사람을 많이 태우면 태울수록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항해시대에 들어서면 왕조가 대항해시대를 관리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인도회사’ 등 회사를 차려서 운영하게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는 갤리선을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갤리선을 사용한다면 ‘노예’를 노잡이로 썼다. 그 이유는 ‘비용’ 문제 때문이다. 다만 그때는 큰 노를 여러 명의 노예가 함께 젓는 방식이 도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