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2024-05-22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82년 5월 22일은 조선과 미합중국 사이에 체결된 수교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날이다. 오늘날 한미관계의 시작이다. 또한 우리나라로서는 역사상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이 조약을 시발점으로 1883년에는 영국, 독일제국, 1884년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1886년 프랑스 제3공화국,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최초로 태극기를 사용한 조약이기도 하다. 본래 국기(國旗)가 조선에는 없었지만 미국 측이 외교적 상징물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면서 김홍집의 명으로 역관 이응준이 제작했다. 이때 사용된 태극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이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등에서 도안해 이듬해인 1883년 3월 6일 공식 국기로서 공포되기에 이른다.

러시아의 남하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유는 청나라의 권유 때문이다. 1860년 청나라가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를 연해주에 할양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침략에 대비해야 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과 일본의 수교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이뤄질 수 있었다. 만약 청나라가 강하게 반발했다면 강화도 조약은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가 강화도 조약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그 이후에도 러시아의 남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면서 급기야 1879년 이홍장은 조선에게 “미국과 영국은 무역이익을 추구하지만 러시아는 영토를 빼앗는다”면서 영국과 미국 등과 조약을 맺어 러시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역시 러시아가 청나라의 연해주를 할양받으면서 두만강을 경계로 하면서 국경을 마주하게 되면서 그에 따라 영국과 미국 등과 수교를 맺을 필요성을 인지하게 됐다. 여기에 일본 역시 러시아 남하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서 미국과의 수교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나름 평등한 조약

서양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지만 주문들은 불합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강화도 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는 ‘관세’라는 것을 뭔지 몰랐기 때문에 불평등하게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홍장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상당히 배려를 해주면서 미국과 평등한 지위에서 수교를 맺게 해줬다. 방곡령 역시 강화도 조약을 반면교사 삼았기 때문에 방곡령도 조선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최혜국 대우는 현재에도 수교국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라서 특별할 게 없었다. 다만 조선은 상선이라고는 나룻배밖에 없었기 때문에 외국 상인들에게만 유리한 조약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