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잔술
2025-05-28 어기선 기자
잔술의 원조 ‘선술집’
잔술 문화는 우리나라의 문화이다. 그것은 ‘선’술집에 기인한다. 조선 후기에는 백성부터 관리까지 즐겨 이용했던 술집의 한 유형으로 ‘선’술집이다. 반드시 서서 마셔야 했기 때문에 선술집이다. 선술집의 한 형태가 ‘목로주점’이다. 목로란 선술집에서 술을 팔기 위해 설치한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이런 선술집에서 판매를 했던 것이 바로 ‘잔술’이다. 선술집에는 주모는 앉아 있을 뿐 손님은 서서 마셔야 했다. 그리고 술 한 잔을 사면 안주를 하나씩 끼워줬다. 즉, 조선시대 선술집은 술값에 안주가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에는 ‘술’을 전매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금이나 인삼 등은 전매를 했지만 유독 ‘술’만은 전매를 하지 않았다. 선술집이 생겨난 것은 정조 시대부터이다. 그 이유는 영조대왕 통치 기간 동안 ‘금주령’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1724년에 즉위하여 1776년까지 무려 5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금주를 시행했다가 정조가 왕에 오르면서 금주령을 해제했다. 그러면서 술의 판매가 가능해졌다. 영조시대부터 대동법 등이 시행되면서 시장 경제가 살아나면서 여러 가지 음식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그 상황에서 정조시대 들어서면서 금주가 해제되면서 선술집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1909년 주세법 이후
1909년 일제가 주세법을 공포하면서 가정이나 주막, 동네 양조장에서 술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1919년 이후 영세업자의 소규모 생산을 사실상 금지했다. 그러면서 주막 등이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덩달아 선술집도 사라지게 됐다. 특히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물자가 징발되면서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게 됐다. 하지만 선술집을 대체하는 곳이 바로 포장마차의 등장이다. 포장마차는 광복 이후 등장한 간이주점이다. 광복을 맞이하면서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나 6.25전쟁 당시 북한을 피해 월남한 피난민 등을 중심으로 포장마차 운영을 했다. 다만 각종 세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저렴한 술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특히 포장마차에서는 잔술 파냄를 하면서 이것이 2000년대까지 잔술판매가 이어졌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포장마차가 점차 위축이 되면서 그에 따라 잔술 판매 역시 점차 사라지게 됐으나 최근 주류 가격이 상당히 높아지면서 그에 따라 잔술 판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특히 MZ세대의 경우 ‘병째’ 마시는 것보다는 오히려 ‘잔술’로 마시는 것을 선호하면서 ‘잔술 판매’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음식점 입장에서 술을 한 병 째 판매할 경우 5~6천원이지만 잔술 판매를 할 경우 한 병 용량의 술을 판매하면 그만큼 더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