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삐라

2025-05-29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지난 28일 오후 11시 34분 북한이 대남전단으로 추정되는 미상 물체를 식별했다는 위급 재난 문자가 발송됐다. 이에 시민들이 놀랐다는 반응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시민들은 북한이 전단지를 뿌린 것 같다면서 위급 재난 문자까지 발송할 정도냐는 지적도 있었다. 반면 일부 시민들은 북한에 대한 경계는 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면서 위급 재난 문자 발송에 대해 옹호하기도 했다.

삐라

삐라는 전단지를 가리키는 일본어 비라(ビラ)]에서 유래된 말이다. 지금은 ‘전단지’로 불리고 있지만 ‘대남 심리전 용도’로 사용하는 전단지만을 일컫는 말이 됐다. 삐라가 탄생된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엄청난 양의 전단지를 투하했기 때문이다. 해당 삐라는 항복 권유 문서가 아니라 융단 폭격 예정 도시를 안내해주는 안내문의 성격이 강했다. 즉, 폭격 예정지에 미군이 폭격을 하겠다고 알려줌으로써 해당 지역 시민들이 충분히 대비를 하라는 차원이었다. 그것은 민간인 살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미리 알려준다는 것은 그만큼 미군이 압도적인 화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본 국민들에게 알려줌으로써 항복을 유도하기 위한 것도 있다. 아울러 국제적으로도 최소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삐라가 6.25 전쟁을 거치면서 UN군이 북한 지역에 수많은 삐라를 뿌렸다. 그리고 전쟁 이후 북한은 대남 심리를 위해 삐라를 뿌렸다. 공산주의 선전을 위한 것으로 남한 영토에 살포한 것이다. 문제는 이로 인해 월북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삐라 단속이 엄하게 이뤄졌고, 어린이나 학생에게는 발견 즉시 신고하도록 교육했으며, 현상금을 내걸었다. 현상금으로는 공책, 자, 연필 등 학용품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가난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이에 1980년대까지도 삐라를 주우러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다. 휴전선 일대에는 삐라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만큼 삐라가 많이 넘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와 민주화 등의 격차가 이뤄지면서 삐라가 별다른 효용을 보이지 않으면서 상당히 많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