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6월 3일 최영 실각
2025-06-03 어기선 기자
이인임 세력 축출했지만
1388년 무진피화 사건으로 이인임 세력이 축출됐다. 이인임 세력이 축출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은 최영과 이성계이다. 그러면서 권력은 최영과 이성계가 나눠갖는 구조가 됐다. 이인임 세력이 축출되면서 권문세족의 토지를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최영과 이성계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최영의 권력기반은 권문세족이었고,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였다.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의 토지를 완전히 몰수해서 정전제를 기반으로 한 토지개혁을 하고 싶어했지만 최영은 그것에 대해 반대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진피화 사건으로 이인임 세력을 모두 숙청했지만 이인임만은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끝냈다. 이것이 무인세력과 사대부 세력의 불만을 키워왔다.명나라 철령위 설치
여기에 1387년 12월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통고했다. 이것은 고려 조정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줬다. 그리고 최영은 결국 요동 정벌을 결심하게 됐다. 일각에서는 최영이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요동정벌을 결심했다고 판단하는데 우군도통사가 최영이었고, 좌군도통사가 조민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단순히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요동정벌을 단행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또한 조민수가 이성계 편을 들어 위화도 회군을 함께 단행했다는 점을 살펴보면 조민수 역시 최영에 대한 신뢰가 별로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무인세력 역시 이인임을 귀양 보낸 것에 대해 최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는 것을 말한다.압박 받았던 최영
다만 최영은 무진피화 사건으로 이인임 세력을 축출했지만 그것이 권력의 균형추가 깨지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는 사건이 됐다. 최영이 우왕 시절 권력을 잡았던 것은 이인임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다만 패착은 이인임 세력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진피화 사건으로 이인임 세력이 축출되자 거꾸로 이성계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기 위해 요동정벌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