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1일 솜 전투 발발
2025-07-01 어기선 기자
독일 전력 소모시키기 위해
솜 전투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독일의 전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합동 공세 작전이었다. 그리고 7월 1일 하루 영국군만 5만 9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문제는 독일군에 타격을 준 것도 아니다. 독일군이 철조망과 기관총을 앞세웠기 때문에 영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세는 11월까지 계속 이어졌다. 솜 전투는 11월 18일 폭설이 발생하고 나서야 중단됐다. 결국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6마일(9.66km) 정도 전진했다. 이로 인해 영국군은 42만명, 프랑스군은 2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 역시 40~50만명의 손실이 이뤄졌다.기관총의 등장, 그럼에도
사실 솜 전투는 무리한 전투였다. 철조망과 기관총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상부에서는 무조건 공격만 외쳐댔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기존의 전투방식을 고수했다. 기존의 전투방식은 부대가 무너지더라도 무조건 전진해서 진지를 빼앗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무기라면 가능했지만 기관총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기관총은 휴대하기는 어렵지만 지키고자 하는 쪽에서는 유리한 무기였다. 즉, 공격하는 쪽에서는 기관총을 휴대하고 전진할 수 없지만 독일군은 기관총을 갖고 충분히 지켜낼 수 있었다. 이것을 만약 영국군과 프랑스군 상부가 알았다면 공격을 중지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상부는 계속해서 공격 명령만 내렸다.참호전 전투로
솜 전투 이후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엄청난 경험을 얻었다. 그러면서 참호전 전투로 이어졌다. 그것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는 값진 경험이었고, 참호전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은 장기전이 됐다. 미국이 참전을 하지 않았다면 영국, 프랑스, 독일 국민 모두가 전쟁에 희생됐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전과 기관총의 등장은 그야말로 인류애를 말살시키고도 남을 만했다. 무기 앞에서 인류는 그야말로 살육 그 자체였다. 심지어 영국의 한 마을은 솜 전투로 인해 젊은 남성이 사라졌다. 어떤 젊은이는 전쟁이 끝나고 동네에 돌아오니 자기 또래 남자들이 모두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살아돌아왔다면서 ‘겁쟁이’라고 비난을 했다. 솜 전투는 지식인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을 주는 전투였다. 이에 다다이즘 미술 사조와 허무주의 문학이 탄생했고, 실존주의철학이 나타났다. 아돌프 히틀러가 솜 전투에 참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