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고려인

2024-07-09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실리뷰=어기선 기자] 고려인은 소련 붕괴 후 구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말한다. 흔히 중국 내 거주하는 한민족인 조선족과 대비가 된다. 주로 연해주에 살았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중앙아시아로 대이주를 하면서 지금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민 구성원이 됐지만 한국을 잊지 않고 한국말을 잊지 않고 있으며 한국 문화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연해주로 이동한 조선인

고려인은 19세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기원을 이루고 있다. 1860년 2차 차편전쟁에서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 받았다. 그리고 1869년~1874년 조선 북부에서 대흉년이 발생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북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에 1871년 평안도관찰사 한게원은 정부의 승인 없이 조선인 개간지를 28개 면으로 분할해 각각 강계군에 11면, 자성군에 4면, 초산군에 11면, 벽동군에 2면 귀속시키고 향약을 설치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다만 청나라와 러시아 모두 조선인들의 국경 침범을 묵인했다. 왜냐하면 해당 땅의 농사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은 점차 몰락을 해가고 일제가 점차 대한제국을 먹어가고 있으면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는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보였다. 특히 최재형과 같이 연해주에서 성공을 거둔 한인 지조자들이 의병장 등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해주 한인들이 러시아군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우면서 독립을 꿈꿨다. 실제로 1919년 3.1 운동에 호응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소련 정권 지지했는데

러시아 내전이 터지면서 연해주 한인들은 소련 정권을 지지한다. 그것은 소련이 독립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은 ‘백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적백내전에 개입하면서 연해주를 침공했고, 그리고 수많은 한인 정착지를 공격해서 최재형 등 수많은 한인들이 사망을 했다. 내전이 종결되자 소련 정부는 고려 혁명군을 비롯해 붉은 군대에 협력한 독립군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의 숫자가 넘어 ‘고려인 소비에트 공화국’ 구상까지 가게 됐다.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소련 정부는 고려인의 존재가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고려인이 지속적으로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다. 이에 결국 스탈린은 1937년 8월 21일 고려인의 강제 이주령을 승인하고 강제 이주가 시작됐다. 그해 11월 모두 종료됐는데 강제 이주 고려인이 17만명이 훌쩍 넘어섰다. 이주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이주하고 난 후에도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사망한 고려인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은 벼농사를 시작했다. 다만 중앙아시아가 한반도에 비하면 농사짓기 너무 좋은 땅이어서 한반도에서 농사 짓는 것보다 몇 배의 풍년을 이뤘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다른 민족 사람들은 고려인들의 농사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고 하지만 정작 고려인인 한반도에서 농사 짓는 것보다는 몇 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어서 기뻤다고 한다. 그리고 점차 고려어학교도 세우고, 한글 신문, 고려어 방송, 고려어 극장까지 운영했다. 또한 주변 민족은 고려인의 농사 기법을 배우려고 했다.

지금도 고려말 간직

고려인들이 구사하는 한국어를 ‘고려말’로 부른다. 다만 고려말을 할 줄 아는 고려인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K한류 열풍이 불면서 다시 한국어를 공부하는 고려인이 늘어났다. 그리고 고려인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는 가정들이 많이 있다. 중국은 소수민족에 대한 중화 동화주의를 표방하지만 러시아는 고려인 문화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이에 고려인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