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수탁액 100조 원 증발
2025-07-11 김진혁
[파이낸셜리뷰] “여기 각서부터 써주시지요.”
바이코리아 수탁액이 11조 원을 돌파한 지 닷새 뒤인 1999년 8월 9일. 김석동 금융감독위원회 금융시장안정대책반장은 극비리에 투신사 간부들을 서울 마포의 한 호텔로 불러모았다. 그가 건넨 서류뭉치를 받아든 간부들의 얼굴은 일순간 굳어졌다. 첫 장에 쓰인 제목은‘대우채 환매연기 조치’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밤 8시 투신시장에 쓰나미를 몰고 온 ‘8·12 환매연기 조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환매를 요구하는 가입자에겐 편입 대우채 원금의 50%만 주고, 6개월 이상 기다리면 원금을 거의(95%) 돌려준다는 약속이었다. 부실채권 처리 시간을 벌면서 개인의 투자손실을 대부분 투신사에 떠넘기는 극약 처방이었다.
투신 수탁액은 시차를 두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3개월 동안 40조 원의 환매 요청이 몰렸고 2000년 말까지 약 100조 원이 쓸려나갔다. 투신권에서 불만이 새어나오자 금융감독원은 대대적 검사에 들어가 각종 규칙위반 사실을 들춰낸다. 그동안 펀드를 예금처럼 속여 팔고(불완전판매), 고객자산을 편법으로 바꿔치기한 사례등이 들어났다.
“손실을 우리가 다 떠안으라는 얘기냐”며 절규하던 투신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당시 부실 대우채 발행 잔액은 모두 36조 원이었다. 나중에 자산관리공사가 투신 등으로부터 재매입한 금액은 3분의 1인 13조 원이었다.
정부는 투신권 공룡 한국투자신탁과 대한투자신탁의 파산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 1999년 11월부터 각각 5조 원과 2조 9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후 한국투자신탁은 2004년 동원금융지주(현 한국투자금융지주)에 팔리고, 대한투자신탁은 2005년 하나금융그룹에 넘어갔다.
바이코리아를 판매한 현대그룹의 국민투자신탁은 자체 정상화 시도에 나섰다가 실패해 2004년 2조 5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수혈받았다. 정상화와 동시에 푸르덴셜금융그룹에 넘어갔던 국민투자신탁은 이후 부진한 실적으로 고전하다 2010년 다시 한화그룹 산하로 들어갔다.
투신사 수탁액은 2004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3억 만들기 펀드’로 적립식펀드 붐을 일으킬 때까지 5년간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때 반 토막 났던 바이코리아 펀드는 20년이 지난 현재 수차례 리모델링을 거쳐 한화자산운용의 ‘코리아레전드’ 펀드로 명맥을 잇고 있다.
주식 부양책이 경기를 이길 수 없다. 특히 미래 주식 시세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 역사를 공부하고 낙관론과 비관론을 경계해야 한다. 단지 주식을 싸게 사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 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