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2025-07-23     어기선 기자
KBS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94년 7월 23일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 발발한 날이다. 갑오사변이라고 부르고, 후속조치로 갑오개혁이 있다. 청일전쟁을 앞둔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면서 사실상 조선의 영향력을 일본군 아래에 두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개입한 삼국간섭이 발생하면서 조선은 급격하게 친러 정권으로 기울어졌고, 결국 을미사변까지 일어났다.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에 가려지면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뼈아픈 한국사 중 하나다.

동학농민혁명 발발하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아산만을 통해 2800명의 병력을 파병하고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파병 사실을 알렸다. 일본은 일본 거류민과 공사 보호 목적으로 8천명의 병력을 인천으로 파병했다. 외국군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결국 농민군과 조선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해산했다. 조선 조정 역시 청나라와 일본에게 다 끝났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한양으로 진격했다. 조선군은 당시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기 때문에 경복궁을 경비하는 병력은 일부에 불과했다. 일본은 조선군대가 먼저 발포해서 응전했다면서 조선 책임설을 훗날 주장했지만 일본군이 먼저 경복궁으로 기습 공격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분전했지만 허위 문서 때문에

7월 23일 0시 30분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 작전을 실행한다. 04시 일본은 영추문을 통해 궐내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평양 기영병과 일본군 간 교전이 발생했다. 같은 시각 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역시 조선군은 만만치 않게 저항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고종을 붙잡았다. 그러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 와 궁궐을 포위하려고 했다. 이때 누군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어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킨다. 물론 이를 무시하고 경복궁으로 진입해서 일본군을 소탕할 수도 있었겠지만 명령서가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판별하지 못한 조선군은 결국 무장해제 해야 했다. 일본군은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을 하도록 요구했다.

을미사변 단초 제공

조선군은 무장해제를 하기 전에 일본에게 무기를 넘겨줄 수 없다면서 스스로 파괴를 했다. 압수된 무기는 일본군에 의해 연못으로 던져 고장 나게 했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조선군이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한 것 역시 변변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군이 압수한 무기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회선포 8정 등이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을미사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오사변 이후 일본군은 궁궐을 향해 함성을 질렀더니 조선군이 겁을 먹고 항복을 했다는 식의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가짜 명령서에 의해 자진해산을 했을 뿐이었다. 가짜 명령서가 없었다면 아마도 격렬하게 저항을 했고, 일본군을 경복궁에서 몰아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