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르완다 그리고 새마을운동
2025-07-29 어기선 기자
후투족 vs 투치족
르완다는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부족 간의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독일의 지배를 받으면서 후투족과 투치족으로 구분됐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 위임 통치령이 됐다. 벨기에는 식민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소수족인 투치족을 관리지배층으로 선택해 특혜를 주면서 다수인 후투족에게 가혹한 통치를 시행했다. 그러면서 후투족과 투치족의 대립과 갈등이 증폭됐다. 1946년 부룬디와 합병되면서 ‘루안다-우룬디 신탁통치령’이 됐다가 1959년 르완다 왕국이 세워졌다. 하지만 후투족의 봉기가 일어마면서 르완다 왕국이 무너졌다. 그러면서 투치족 탄압정책을 펼쳤고, 1965년 후투족 일당 독재 국가가 성립됐다. 이에 1만명의 투치족이 학살되고, 30만명의 투치족이 해외로 추방됐다. 1973년 쥐베날 하뱌리마나가 쿠테타로 대통령에 집권하면서 투치족을 학살했다. 이에 1979년 해외 망명 르완다인들이 폴 카가메를 중심으로 르완다민족통일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면서 르완다 내전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르완다 학살이 벌어졌는데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107만 1천 명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투치족 여인들은 대거 강간을 당하는 수모를 당해야했다. 투치족 약 70%가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후투족의 고립으로 이어졌고, 르완다민족통일동맹이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해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면서 내전이 종식됐다. 다만 후투족은 르완다민족통일동맹이 보복을 하지 않을까 공포에 떨었다.내전 종식되자마자
하지만 내전이 종식되자마자 후토족 온건파와 거국정부를 수립하고, 후투족 상대로 보복을 금지시켰다. 그러면서 후투족 난민들이 다시 르완다로 되돌아왔다. 2003년 폴 카가메는 대선에 출마해 9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리고 르완다 국제 전범 재판소를 설치해 전범들에 대한 심판을 내렸다. 또한 르완다 전통 마을 규모 재판인 ‘가차차(Gacaca)’를 국가적으로 장려하여 죄질이 크지 않거나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을 지역 공동체들이 직접 정할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폴 카가메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주목했다. 그것은 새마을운동이었다.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새마을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치안 강화와 부패 척결에도 힘을 썼다. 폴 카가메 대통령이 직접 거리를 쓸면서 거리가 깨끗해졌다. 이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은 ‘우무간다(Umuganda)’라는 이름의 휴일로 18세에서 65세의 모든 르완다인들이 밖으로 나와 아침 8시부터 11시까지 청소하는 날이다. 여기에 르완다 의회에서 여성 국회의원 비중을 64%로 세계 1위를 달성하면서 여성 인권 신장이 이뤄졌다. 카가메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따라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놀라운 성과를 달성했다. 하지만 철권통치와 공포정치를 앞세워 군림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