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기사(騎士)

2024-09-02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기사(騎士)는 중세 유럽의 병과 중 하나로 ‘말을 탄 무사’라는 뜻인데 어느 순간부터 ‘신분’으로 바뀌었다. 봉건제 하에서 군주가 가신에게 봉토를 수여한 후 군사적 충성을 약속받고 숙련된 병력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화약’과 ‘대포’가 발명되면서 기사는 ‘병과’이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특히 12세기부터 ‘기사도 정신’이라는 것이 쌓여가면서 기사라는 신분은 ‘고귀한 신분’으로 취급받게 됐다.

게르만 민족 침공하면서

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침공으로 인해 기병대가 점차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프랑크 왕국이 세워지면서 사라센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기사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중세시대 농업의 발달과 더불어 이민족의 침략이 잦아지면서 발 빠르게 대응할 군대가 필요했고, 이에 기사의 중요성이 점차 커져 나갔다. 왕과 황제는 야만족의 침입에 일일이 대응할 수 없었고, 봉건영주 입장에서도 농노들에게 농경과 방어를 함께 하게 할 수 없으면서 ‘기사’라는 병과가 탄생하게 됐다. 주로 봉건영주 밑에 있었던 부하들 중에 힘이 센 사람들에게 기사라는 병과를 줬다. 이때 당시 기사는 ‘직업의 일종’이었다. 이런 이유로 딱히 고귀한 태생도 아니었고, 고귀한 계급도 아니었다. 기사 중 우연찮게 영주로부터 봉토를 받으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지만 봉토를 받지 못하는 기사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따라서 기사가 곳곳을 달리면서 약탈을 하기도 했다.

점차 계급화

그런데 1152년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농부들이 기사들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금지했고, 1187년 프리드리히 1세는 농민의 아들이 기사로 서임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면서 준귀족화의 길을 걷게 됐다. 이에 점차 기사는 고귀한 신분으로 바뀌게 됐다. 이에 기존에 기사의 이미지는 ‘난폭하고 방탕한 사람들’에서 ‘칼 들고 밤샘 기도하면서 신앙심을 증명하는 사람들’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이처럼 바뀌게 된 것은 더 이상 나눠줄 봉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기사 작위를 내리는 것은 ‘왕’이 하는 고귀한 행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십자군 전쟁 이후 이민족 침략도 줄어들면서 기사의 필요성이 점차 약해졌다. 여기에 13세기 들어서면서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왕의 사법권과 행정권이 확대되면서 기사는 지역 유지이면서 왕의 관료이면서 전문군인이면서 치안책임자가 됐다. 그러다가 화약과 대포가 발명되면서 더 이상 기사가 전쟁의 주역이 되지 못하게 되면서 기사라는 직업은 사라지고, 일종의 신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