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사적 제재 그리고 결투재판
2024-09-26 어기선 기자
사적 제재의 한 형태, 중세시대 결투재판
사적 제재의 한 형태가 중세시대 결투재판이다. 결투재판이란 참가자 둘이 상호 동의하에 입회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이는 싸움이다. 승자가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다. 결투재판은 중세시대에는 흔한 형태였다. 1215년 타테라노 공의회에서는 결투에 참가한 사람과 협조자를 파문으로 단죄하는 등 금지를 해왔지만 공공연하게 결투재판이 이뤄졌다. 하지만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결투재판 자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그 이유는 중앙정부의 행정 장악력이 상당히 높아지면서 사법부 권위가 높아지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결투재판 대신 사법부 재판에 의존을 하게 됐다. 또한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귀족 신분이 권위가 약화됐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노동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결투재판이 사라지게 됐다.결투재판 하는 이유
결투재판을 하게 되는 이유는 ‘잉여 귀족’ 숫자의 통제와 맞물려 있다. 중세시대 귀족은 평소 백수 생활을 하지면 전쟁이 발발하면 장교 신분으로 참전해 외적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햇다. 문제는 평화가 지속되면 ‘놀고 먹는 귀족’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앙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놀고 먹는 귀족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귀족 입장에서 볼 때 영유아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자녀를 많이 낳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나눠줄 토지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토지는 대체적으로 장자의 몫이 되고, 차남 등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실업자가 된 귀족들은 왕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왕으로서는 이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다른 수단을 사용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왕은 결투재판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으면서 눈 감아 줬다. 결투재판에도 여러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상대가 외아들일 경우 결투재판을 신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를 끊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외아들이 결투재판을 신청해도 피한다. 전쟁 중이거나 전쟁 바로 직후에는 결투재판을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노동력이 감소했기 때문에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물론 대귀족 자제에게는 결투재판을 신청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