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0월 17일 10월 유신
2025-10-17 어기선 기자
1971년 제7대 대선 결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제7대 대선에 3번째로 출마를 했다. 그러면서 국가 예산의 1/7에 해당하는 거액의 선거 자금을 사용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 대선 후보에게 승리를 했지만 표차이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김대중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은 단독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3선까지만 하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더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김수환 추기경이 1971년 12월 25일 명동성당에서 강론을 통해 대통령 연임에 대한 비판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결정타이다. 여기에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통보하고, 주한 미 7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뿐만 아니라 1972년 닉슨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중국을 방문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당황스러웠다. 결국 7.4 남북 공동성명을 채택헸다. 그러면서 북한은 1인 독재 체제를 강화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단행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직선제에서 간선제로
10월 유신의 핵심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로 변경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헌법의 기본권을 중단하는 긴급조치를 시행할 권리를 내세웟다.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리고 중임 및 연임 제한을 폐지하면서 종신 집권이 가능하게 됐다. 또한 대통령을 입법, 사법, 행정 3권 위에 위치하는 국가 영도자라고 규정했다. 이런 유신 체제는 1979년 YH 사건과 김영삼 제명 파동이 터지고 10.26 사건을 거치면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기존 간선제는 채택하면서도 유신 체제를 종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군부독재를 계속 이어갔고, 결국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9차 개선을 했고,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면서 87년 체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