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 경제리뷰] 석굴암

2024-11-04     어기선 기자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석굴암은 경주 토함산에 있는 암자로 통일신라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석굴암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양식이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에 전파됐다는 것을 입증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불교 전성기 때 완성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시기 시중이었던 김대성과 이성룡에 의해 창건해 774년 완공됐다. 하지만 신라 멸망 이후 그 존재감이 약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실상 방치됐다. 조선시대 숙종 29년(1703년), 영조 34년(1758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 존재에 대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이는 개화기 때 일본인이 경주를 방문, 불국사를 방문했지만 석굴암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만큼 석굴암은 존재감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07년 배달을 가던 우체부가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띄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불상이 파괴될 정도로 보존상태가 불량이었다. 이에 1910년 조선통감부는 석굴암을 해체한 후 경성부(현 서울)로 옮길 계획을 했지만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이전을 포기했다. 그러면서 전면적인 수리를 했다. 일제가 수리를 한 이유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식민지 지역의 역사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것이 국가 위신을 홍보하는 사업이었다는 것을 알고, 차용한 것이다. 즉, 일제가 식민지로 새로 편입한 한반도의 여러 가지 문화재를 지정하고 조사하면서 영국을 따라 한 것이다.

일제가 복원하려고 했지만

이에 1913년 10월부터 복원을 시도했고,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했다. 하지만 거액을 들여 한 복원은 그야말로 엉터리 그 자체였다. 수리 과정에서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콘크리트 타설을 했지만 방습에 취약했다.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와 칼슘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켰던 것이다. 일제는 이를 몰랐기 때문에 복원이 엉터리로 진행됐다. 또한 석굴암 아래에는 지하수 샘물이 솟는데 이것이 석굴 내부를 냉각시켜서 바닥에 결로를 일부러 일으켜 습기를 배출하게 해서 석굴암 내부에 방습을 했었다. 하지만 일제 건축공들은 이를 몰라서 지하수 샘물을 제거했다. 그러면서 바닥 온도가 높아지고, 석굴 벽면 표면에 결로 현상이 발생했다. 결국 일제가 석굴암을 복원한다고 했지만 ‘실패’한 상태에서 광복을 맞이해야 했다.

해방 이후에도

해방 이후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부 때 재보수를 했다. 문제는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했다는 것이다. 결국 벽면에 습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부를 완전히 밀폐해 에어컨을 가동시키는 방법으로 습기를 제거했다. 문제는 에어컨의 미세한 소음과 진동이 미세하게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밀폐와 에어컨 가동은 완전통제구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