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1월 11일 우금치 전투
2025-11-11 어기선 기자
1차 봉기에서
농학농민운동은 1차 봉기에서 전주성까지 차지를 했다. 다만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을 하려고 하면서 조정은 급히 화의를 제시했고, 농학 농민군 역시 합의를 해서 자진 해산했다. 문제는 일본군이 한성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면서 ‘갑오개혁’이라면서 내정간섭을 일으키자 동학농민군은 분노하면서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추수가 끝나 병력과 군량의 동원이 용이한 시기를 기다렸고, 때가 되자 전봉준은 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했다. 그러면서 농민군은 점차 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논산에 집결한 후 공주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조정은 사태가 심상치 않자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했다. 일본군 역시 농민군 진압을 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정부에게 압력을 집어넣는데 농민군이 청군과 결탁해서 일본군에 대항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면서 조일연합군이 구성됐다.전투에서 패배
우금치 전투에서 두 번이나 진격을 가했지만 패배를 했다. 농민군은 패주를 했고, 농민군은 와해됐다. 이에 농민군은 해산을 했고, 전봉준은 관군에 붙잡혔다. 농민군이 패배한 원인은 속전속결로 한성에 진격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관군과 일본군이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주 우금치에 병력을 배치시켰다. 우금치는 말 그대로 ‘고개’이기 때문에 고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사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조일연합군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일연합군은 ‘개틀링 기관총’을 배치했고, 신식 무기로 무장을 했다. 반면 농민군은 죽창, 창, 농기구 등과 구식 대포 그리고 조총 뿐이었다. 게다가 농민군 지도부는 계속해서 우금치 정상을 정복하라고 농민군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그것은 비효율적이었다. 차라리 게릴라 전술을 택했다면 인명 피해가 극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게릴라 전술을 선택했다면 농민군의 이탈이 상당했을 것이기 때문에 밀집대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차 봉기는 민란의 성격이 강했다면 2차 봉기는 나라를 뒤집어 엎는 성격이 강했다. 이런 이유로 민심의 이반도 상당했다. 민심은 아직까지 조선왕조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