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동덕여대 사태 그리고 정원식 총리 밀가루 세례

2025-11-27     어기선 기자
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동덕여대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1991년 정원식 당시 총리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밀가루 세례를 받은 것이 떠올린다는 사람들도 있다. 동덕여대는 남녀공학 전환 등에 대한 고민에 들어갔는데 학생들이 반발하면서 공간 점거 상태에 들어갔고, 설립자 동상 및 학교 곳곳을 락커칠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면서 논란이 됐다. 그러면서 학교측과 총학생회가 3차례 면담을 진행했지만 결렬이 됐고, 학교 측은 입시 일정 등을 고려해 가처분 신청을 하기로 했다. 또한 시설 훼손 등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서는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총학은 학교 측이 남녀공학 전환을 완전히 철회해야 본관 점거를 해제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학교 측은 학생들이 본관 점거를 풀어야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와 더불어 락커칠 등으로 인한 건물 훼손 등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청구되는 손해배상 청구 금액이 50억원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덕여대에 대한 이미지 실추를 어떤 식으로 회복하느냐도 중요한 문제이다.

1991년 분신정국으로 코너 몰린 노태우

동덕여대 사태가 1991년 분신정국 하에 한국외대 정원식 당시 총리의 밀가루 세례와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었는데 ‘보통사람’을 표방하면서 출현한 정부였지만 신군부 세력이 여전히 정권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대학가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로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그것은 여소야대 정국과 12.12 군사반란의 단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재평가 요구 등으로 인해 노태우 정권이 코너로 몰리자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등 강경대응으로 이어졌다. 이에 학생들은 저항의 의미로 분신자살을 택했다. 특히 4월 26일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전경에게 집단폭행 당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대비되면서 대학가와 운동권은 크게 격앙됐다. 그러면서 노태우 정권은 코너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김지하 시인은 5월 5일 조선일보 칼럼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면서 분신자살은 안된다고 호소했다. 게다가 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면서 처음으로 ‘주사파’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런 가운데 시민들이 운동권에 등을 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정원식 당시 총리 밀가루 세례 사건이었다.
1991년

밀가루 세례로 기사회생

6월 3일 정원식 총리가 총리직을 수락하면서 시간강사로서 마지막 수업을 한국외대에서 하려고 등교했다. 하지만 운동권 학생들은 총리직 수락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다. 결국 학생들은 정원식 총리에게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면서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이것이 TV에 고스란히 생중계됐고, 신문 1면을 장식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시선은 완전히 차가워졌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운동권 학생들에 대해 국민적 시선은 우호적이었다. 왜냐하면 87년 민주화운동을 이뤄낸 것도 운동권 학생들의 노력 때문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노태우 정권 편이 아니라 학생들 편이었다. 그런데 운동권 학생들이 정원식 총리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붓자 “어떻게 학생이 스승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붓냐”면서 국민들이 분노했다. 언론들은 가급적 운동권 학생들 편에서 보도했지만 이미 국민들은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되면서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비판 여론은 산을 이뤘다. 노태우 정권은 기회를 잡았다면서 ‘반인륜적 행동’으로 규정하고 ‘용공세력’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운동권은 대대적인 저항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민심은 그들의 비호하지 못했다.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에서 야당 후보들은 줄줄이 낙선하고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지방의회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